그야말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이다. 과연 ‘승리게이트’의 끝엔 뭐가 있을까. 일명 ‘황금폰’으로 불리던 정준영의 휴대폰은 세상에 공개 되자마자 각종 재앙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되며 ‘악마폰’이 되고 말았다. 저급한 그들만의 리그가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만연한 ‘도덕적 해이’는 범죄 행위를 일종의 값싼 오락거리로 전락시켰고, 죄의식이란 통증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타’라는 이름의 값비싼 가면 뒤에 남겨진 ‘
동화책을 읽고,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에 빠져 즐거웠던 때가 내게도 분명 있었는데, 사실 그게 언제쯤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동심(童心)이 자라나 어른의 눈을 갖기 시작하면서 불행하게도 차츰 순수함을 부정하게 된다. 아마도 그건, 그것이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체득했기 때문일 터. 현실을 떠난 모든 건 불필요한 것이기에 상상의 눈은 닫혀 버리고, 웃음을 잃은 무거운 표정만이 남는다. 세상 살기 힘들다는 푸념과 함께. 삶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어른은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영화 ‘메리 포핀스 리턴즈&r
사랑이야기는 늘 진리다. 행복으로 시작해서 때로 불행한 종착역에 다다를지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영화 속 사랑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뻔한 스토리인데도 그저 마냥 부럽기만 하다. 누군가 그랬던가.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그런데도 애써 괜찮은 척 하기가 힘들다.언제부턴가 지인들 사이에서 혼영(혼자 영화보기)의 아이콘이 돼버린 지 오래다. 늘 커피 한잔을 들고 극장을 찾곤 했는데 오늘은 그 쌉싸름한 맛보다 달달한 팝콘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촉각으로 전달되는 달콤함을 대신할 대체재를 미각에서 찾는
매일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하고 주말에는 하루 종일 학원에서 수업을 듣느라 늘 피곤한 상태로 지냈던 나의 학창시절. 4당5락에서 3당4락(하루 3시간만 잠자면서 공부하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4시간 이상 자면 불합격한다는 뜻)을 강조하던 그 시기, 소위 SKY로 지칭되는 명문대에 합격하기 위한 조건은 수면시간조차 압박할 만큼 그렇게 가혹한 것이었다.마음껏 놀아야 할 10대, 놀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고 ‘미래를 위해서’라는 모두가 같은 목표아래 자유는 저당 잡힌 채 숨 막히도록 공부를 강요당해야만
고민 끝에 며칠 전에야 비로소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댓글이 얼마나 있는지, ‘좋아요’는 몇 개인지 사람들의 관심도를 관찰한다. ‘품앗이 정신’을 발휘해서 답글을 쓰고, 상대의 SNS를 찾아가 ‘좋아요’를 누른다. 그저 아직은 오랜 시간 연락이 끊겼던 지인들과의 조우가 반갑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 맺어짐이 신기하기만 할 따름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눈동냥, 귀동냥으로 남의 것을 관찰하던 것과는 다른 첫 경험에서
여기저기 보이는 구세군의 빨간 냄비, 해마다 보는 풍경이 어느새 한해의 끝자락임을 알려주는 상징 같다. 그냥 지나치긴 뭔가 미안한 맘이 들어 작은 성의를 표한다. 내 작은 정성이 어려운 이웃에게 쓰인다는 뿌듯함도 있지만 그저 올해를 마감하는데 착한 일 한 가지는 해야 해피엔딩 연말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앞선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불러오듯, 이내 엄마 손을 잡은 꼬마 아이가 빨간 냄비에 꼬깃꼬깃 접은 지폐 한 장을 넣는다. 그리고는 밝게 웃는 얼굴로 엄마를 쳐다본다. 아이의 해맑음이 세상 무엇보다 예쁘게 보인다.매일 접하는
지난 칼럼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통해 본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헌사(獻詞)였다면, 이번에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문화현상으로 자리한 ‘퀸 신드롬’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미 밝힌 바 있듯이 난 ‘퀸심’ 가득한 팬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가 오래지 않은 신입 덕후 쯤 된다. ‘퀸덕후’에게 있어 영화N차 관람은 기본이고, 떼창은 필수, 멤버들 코스프레는 선택사항이다.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굿즈도 마련해야한다. 사
듣고 또 듣고 계속 듣고... 이런 게 중독이란 걸까? 작품 속 주인공을 이토록 존경했던 적이 있었던가? 난 지금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후유증으로 시작된 ‘퀸앓이’ 중이다. 차마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묘한 매력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는 형국이랄까. 퀸의 음악, 마치 늪 같다.콧수염, 청바지에 러닝셔츠도 무대의상이 되는 스타일리시한 남자 프레디 머큐리, 어린 시절 기억나는 그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그랬다. 소프트함과 파워풀함을 넘나드는 보컬이 마냥 좋아 그가 만들었던 퀸의 명곡
웃음 상실의 현실을 뒤로 하고 찾은 극장에서 웃음 만렙(최고의 레벨을 뜻하는 신조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미뤄 두었던, 아니 어느 순간 잃어버렸던 엔돌핀과 재회한 느낌이랄까. 실로 매력적인 영화를 오랜만에 만났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완벽한 진실이 아님을 깨닫게 해줘 ‘진실게임’이 시조새 취급 받게 만든 작품, 바로 영화 ‘완벽한 타인’이다. 디지털 시대에 발맞춰 ‘휴대전화 잠금 해제’를 통해 100% 사생활 발가벗기기가 가능한 진실게임 업그레이드 버전인
가수 구하라와 전 연인 최모씨의 폭행사건으로 촉발된 ‘리벤지 포르노’에 대해서 급기야 청와대가 나섰다. 그간 계속 문제제기가 있어 왔으나 개인의 사생활이라 치부하며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제라도 다행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론 씁쓸한 뒷맛을 어쩌지 못하겠다. 피해를 당한 일반인들의 하소연에는 귀 닫고 있다가 유명 여자 연예인의 사생활이 언론에 노출되고 대중들의 공분을 사기 시작하면서 청와대 국민청원에까지 등장하게 되니 본격적인 행동개시에 들어간 모습이 개운할리 없지 않은가. 마치 한바탕 요
숨쉬고, 먹고, 걷고, 말하고... 공기의 존재처럼 일상적인 것이기에 당연한 거라고 믿는 행위들. 그러나 아파 본 사람들은 안다. 그런 행위들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충분히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 따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사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비교우위에 섰을 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영화 ‘스텝 바이 스텝’은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벤(파블로 폴리)의 재활과정을 그린다. 세상과 단절된 재활원에서의 삶,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
한 편의 움직이는 풍경화를 본 것 같다. 100여분 남짓 ‘타샤 튜더’의 삶에 동화돼 대리만족 한 느낌이랄까.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했는데 MSG 전혀 없는 그녀의 무공해 삶, 솔직히 부러웠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선택하고 개척해 후회 없이 본인의 행복을 일구고 노년을 맞이한 평온함, 그건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 테니까.첫 작품인 ‘호박 달빛’과 코기 강아지를 주인공으로 한 ‘코기빌’ 시리즈 등 그녀의 대표작들이 스크린을 통해 살아 움직인다. 타샤 튜더가
손주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화목한 가족’을 연출한 것에 불과하다. 카메라 너머 아브라함(미구엘 앙헬 솔라 분)에게는 사진 찍는 일조차 스마트폰을 두고 할아버지와 흥정을 하는 영악한 손녀와 그를 짐짝 취급하며 요양원에 보내려는 딸들이 있을 뿐이다.글로벌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먼 나라 아르헨티나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영화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현실을 리얼하게 오버랩 시킨다. 그를 고집 센 ‘앵그리 올드’ 쯤으로 여기는 자식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아직도 인스타그램 안해요? 다들 하는데 당연히 해야지”자주 듣는 얘기다. 소통의 창구가 되니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기도 하지만 뭔가 좋은 것들을 끊임없이 전시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시작하기도 전에 회의감부터 든다. 내게 그럴싸한 포장 능력은 없기에 이 또한 스트레스 유발공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여전히 해야 하나 하는 고민만 현재진행형이다.사람들은 자랑할 가치가 있다 싶은 모든 것들을 SNS를 통해 공유한다. 그 가운데 이른바 #럽스타그램이라 불리는 ‘사랑&r
영화를 보고나서 아버지께 연락을 드릴까 난생처음으로 고민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한 번도 해본 적 없음이 주는 어색함에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마는 용기 없는 내 모습을 마주한다.그게 바로 세월 속에 겹겹이 쌓여버린 아버지와의 좁힐 수 없는 거리임을 깨닫는다. 엄마라는 단어는 굳이 어떤 상황을 연상시키지 않아도 눈물을 쏟아내기에 충분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인데... 거참, 아버지는 그렇지가 않다. 선명하게 표현되는 어떤 감정보다 이런저런 생각이 앞선다. 그래서일까? 눈물을 쏟아냈던 전편 ‘신과함께- 죄와벌&
"몸매는 좋은데 얼굴이 성형한 티가 많이 나네요", "고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네요"유튜브 방송 콘텐츠로 얼마 전 1020세대에게 유행했던 ‘얼평(얼굴평가)’ 방송의 내용이다. 이들은 자신의 사진을 보내고 불특정 다수로부터 외모에 대한 평가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신공격성 돌직구가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보내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이 어떤지 확인하고 싶은 심리다. 거울만 봐도 스스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을 때로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네티즌들의 평가에 이처럼 기댄다. 마치 결정장애를
수고한 일주일을 토닥여주기 위해 노래방으로 간다. 일명 난 ‘혼코노족’(혼자 코인노래방에 가는 이들을 지칭하는 신조어)이다. 불금의 코인노래방은 홀로족들의 성지다. 노래할 공간이 생길 때까지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을 실천하기 위해 기를 쓰고 샤우팅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와 이따금씩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곤 한다. 한 번도 신경 써본 적 없지만 나 역시 다른 누군가의 키득거림 제공자겠지? 막혀있는 작은 공간은 오로지 나만의
행복하세요?간단한 질문인데 명쾌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이것저것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방증일텐데 그렇다고 ‘No’라고 답하긴 싫다. 행복의 궤적(?)이라도 찾아 나서려는 듯 낡은 일기장을 꺼내본다. 언제부턴가 낯설어진 손글씨, 그리고 거기엔 별것 아닌 것에도 즐거웠던 내가 있다.미래와 현재의 구분 자체가 모호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이때에 과거를 되짚어보는 건 분명 퇴행이리라. 그러나 잠시 동안의 추억소환이 무표정한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시간을 거스른 퇴행은 순
아직 정의조차 완벽히 확립되지 않은 채로 “미리 준비해야만 다가올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체계 없는 구호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준비해야 할지도 모호하다. 미디어는 2016년 ‘알파고 쇼크’이후 인공지능(AI)에 우리 삶이 저당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 증폭시켜 놓았다. 일자리 감소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니 빅데이터, 인공지능과 로봇, 3D 프린터 등 4차 산업혁명 주요 관련 업종을 찾아라, 청년취업난이 가중되는 현
예상했던 결과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어벤져스)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그 위력을 제대로 과시했다. ‘역대 외화 중 최단 기간 천만’, ‘역대 최고 오프닝 스코어’, ‘세계 최초 한국 개봉’ 등 작품의 수식어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관객들이 ‘어벤져스’에 갖는 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는 정설 같은 말이 이 작품에는 통하지 않는다. 전편을 능가하는 재미와 오락성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