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다 끝난 일이야. 들춰봤자, 좋을 게 없어.”“확실히 그렇죠. 앞으로 좋은 일은 없을 거예요. 올림포스는 자동차가 배기 가스를 내뿜듯이, 모호입자를 쏟아내고 있어요. 모호입자 없이는 기후 통제가 불가능하거든요. 문제는 이제 임계치를 넘었다는 겁니다. 올림포스가 모호입자를 뿜어내지 않아도, 모호입자가 계속 늘어나는 지경이 됐죠. 아무리 기후 조절을 해도, 이제 대규모 녹색붕괴를 피할 방법이 없어요.”지우의 어조는 죽음 사람의 심장 그래프처럼, 단조로웠다.“다시 말해보게. 대규모 녹색붕괴가 생겨난단 말인가?”“늦어도 일주일 이내
그녀는 냉엄한 미소로 고개를 가로저었다.“이건 불공평해. 당신네 유럽 연합은 우리보다 몇십 배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면서도 온화한 기후와 충분한 강수량을 확보하고 있잖아! 왜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거지?”“모두를 위한 일입니다.”“도대체 누가 누구를 위한다는 거야!”“목소리를 낮추세요! 이곳은 올림포스입니다.”* * *태백산맥처럼 거대한 구름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마킷은 발코니에서 웅장한 바라보았다. 시중이 사우디아라비아 스타일의 달디단 커피와 쿠키를 내왔다. 푸른 대지에는 야자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줄지어 섰고, 보기 좋은 잔디
작은 글씨로 기록된 보험 약관을 읽듯 사무적인 목소리이었다. 시즈도어는 그녀의 입장과 올림포스의 결정을 이해했다. 올림포스는 녹색붕괴를 막기 위한 국제기구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가뭄에 시달릴 수는 없다. 이미 열다섯 개의 저수지가 메말랐다.올림포스의 존재가 우루과이의 희생을 강요하는 거라면 ……. 맞서 싸울 것이다.“우리나라는 전체 전력의 87%를 수력발전으로 생산합니다. 가뭄으로 강이 말라서 전력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비구름에 대한 비용으로 칠천만 탄소 달러를 지불하지 않았습니까!”“말
“에메랄드 같군.” “준은 잘 지내나요?”장수는 화제를 돌리려 했다.“한동안 만나보지 못했네.”“영생자가 되었다고 하던데 ….”“그래. 표범처럼 우아하고 들소처럼 건강하지.”“아시겠지만, 영생자는 겉보기와 달라요. 준도 사실을 알았을 텐데, 자청해서 영생을 주입하다니, 완전 또라이예요.”“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자네의 푸른색 반점을 볼 때마다 그 또라이를 생각하게.”“왜죠?”장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준은 영생자가 된 후, 고대 유물에 생명을 부여했어. 블랙스타라는 석기시대의 유물인데....... 김형석
그녀는 블랙스타 조각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준에게 상처를 남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준에겐 그녀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피가 블랙스타에 닿자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안 돼!”준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자신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냈다. 그는 사그라지는 불꽃을 껴안았다.“왜 이런 짓을 한 거야!”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울먹였다.“괴물로 사는 데 지쳤어. 고마워 너의 무모한 사랑이 나에게 용기를 줬어.” 그녀는 눈을 감으며 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산하는 장수의 승합차 뒤를 따라 별장에 도착했다. 정원을 돌보지 않아 잡풀이 우거져 있었다. 잡풀 속에 시체를 내다버린다 한들.......... 발견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뒷문을 통해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식당이 나왔다. 식탁 위에는 종모양의 크리스털 전구가 매달려 있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꽃 장식, 구형 냉장고, 촌스러운 의자 그리고 준의 휴대폰. 식당은 거실과 통해 있었다. “아주 큰 고양이군.”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장수가 말했다. 그의 발밑에는 야전침낭이 있었다. 산하는 전기충격기를 장수에게 겨눴다. “
산하는 차안에 앉아 건너편 주차 라인에 있는 자동차를 바라봤다. 장수가 빌린 승합차였다. 십여 분이 지나자 장수가 어깨에 묵직한 침낭을 짊어지고 나타났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침낭을 차 안에 넣었다. 산하는 자세를 낮췄다. 그는 스마트 폰으로 준의 휴대폰과 운동화에 심어둔 추적 장치의 위치를 확인했다. 장수의 위치와 일치했다. 준은 정신을 잃고 침낭에 있을 것이다. 그는 무사할까? 아직은 그럴 것이다. 장수와 민이 원하는 건, 길고 지루한........ 영원처럼 느껴지는 참혹한 고통이다. 준의 몸 상태가 온전할수록 더 많은 고통을
“모두 각오했던 일들이에요. 보디가드는 필요치 않아요.”“장수와 민은 자넬 토막 낼 생각이야. 순순히 당하겠다는 건가?”“제가 어찌 되든....... 그것은 제 선택이에요. 다른 사람이 참견할 일이 아니죠.”“........ 템을 만들어낸 죄책감에서 그런 거라면........ 그럴 필요 없네. 인간은 신이 아니야. 완벽할 수 없어.”“완벽을 추구하는 게 아니에요. 제 삶에 충실하고 싶은 것뿐이죠. 제 문제는 제가 해결할 겁니다. 당신은 방해꾼이에요.”마킷은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그는 수풀이 우거진 흙바닥을 바라봤다. 풀잎 사이
“무서운 소리만 늘어놓으셨는데, 솔직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총재는 고개를 흔들었다.“원시인이 현대사회로 온다면, 비행기를 보고 놀라 자빠졌을 겁니다. 총재님의 두려움이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듀아멜은 의도적으로 총재에게 도발했다. 총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총재님, 저는 싱가포르에서 녹색붕괴 현장 구조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느꼈던 절망감을 또다시 맛보고 싶지 않습니다.”“박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총재는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유
듀아멜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아무런 조치 없이 무난히 시간이 지날 경우, 녹색붕괴가 다시 발생한다는 내용이었다. 앞으로 육 개월 이내에 일본 오키나와 섬에서 녹색붕괴가 일어날 것이며, 그 후에는 유럽 전역이 녹색붕괴로 파괴된다.“지금 당장 행동해야 합니다. 파국을 막는 방법이 존재합니다.”‘자발적 붕괴를 예방하는 자발적 행동.’ 그가 내세운 슬로건이었다.듀아멜의 방법은 녹색붕괴가 일어나지 않도록 기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곧바로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기후조절 기술이 존재한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 거란 말인가?
이곳저곳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듀아멜은 질문이 잦아들 때까지 잠자코 스크린을 응시했다.듀아멜은 벽면에 설치된 모니터로 촬영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실제보다 뚱뚱해 보였다. 머리숱은 더욱 많아 보이지만 안색이 어두웠다.“모든 것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아쉽게도 이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아직 없습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반입자 폭풍도 검토하고 있지만, 확신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 다만,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근거는?’“정확한 근거는 찾고 있는 중입니다.”‘칠만 명의 목숨
노인은 주머니에서 테니스공을 꺼내 저 멀리 던졌다. 강아지는 공을 쫓으려다 끄응 소리를 내며 주저앉아, 노인의 다리에 머리를 갖다 댔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먼지가 되어 사라졌다.비옥한 바나나 농장이 석고 반죽처럼 으깨지며 말라붙었다. 수많은 꽃을 피운 파인애플도 색을 잃고 형체를 빼앗겼다. 강과 바다 사이에 있는 거북이 농장도 건조한 먼지 사막이 되었다. 녹색아귀綠色餓鬼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중년 여인은 다가오는 초록 장벽을 보며 실성한 듯 웃어댔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이럴 순 없어.” - 암
“ ……. 레이저 쇼 같은데?”빛은 점점 넓어지며 하늘을 덮었다. 밀림 밑바닥처럼 회색으로 우거지는 암녹색-. 잉크가 퍼지듯 공간으로 스며들고 아래로 흘러내려 바다에 닿았다. 짙은 녹색 안개가 해변으로 다가왔다.에바는 갈매기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리조트 난간에서 일광욕하던 사람들은 갑자기 변한 하늘을 바라봤다.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는 멍한 표정들……. 허공에 초록색 페인트를 뿌린 것 같았다. 물의 빛깔이 어두워졌다.정신없이 바다에서 놀던 이들도 하늘을 올려봤다. 녹색 빛이
- 걱정하지 마!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훨씬 안전해. 공중에서 모터가 멈춰도 바람개비 원리로 낙하산보다 느리게 떨어져. 집에서 TV를 보는 것보다 안전할 거야.-“그런 게 가능해?”- 단비는 항공 역학과 재료공학이 빚어낸 기술의 결정체야. 그 밖에도 네가 놀랄 게 많아. -“단비?”- 우리 처음 만난 날, 단비가 내렸잖아. 그래서 비행기 이름을 단비라고 지었어. 개인 비행기로 세계 여행을 하려면 절차가 복잡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는데, 비행기 개조보다 더 까다로워. 아무래도 수속절차를 대신 해줄 사람을 찾아봐야겠어. 네가 돌아
수수께끼 힌트를 주듯, 장난스러운 뉘앙스.그녀의 미간에 작은 의혹이 스치며 우아한 주름이 잡혔다. 지우는 유치하긴 해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거나 되지 않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헛소리를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상상은 할 수 없었지만, 지금 지우는 정말로 방향만 바꾸면 싱가포르로 올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어떡해?“어떻게?”- 지난번에 보여줬던 거 기억나? -지난번? 그녀는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지우가 뭘 보여줬더라?“ ……. 그건 완전 고물이었잖아! 엔진이
아이들과 교사들로부터 분리된 균은 독특한 생화학 성상과 특이한 항생제 내성 패턴을 보였다. 알려지지 않은 신종 결핵균이었기에, 세균 테러 가능성까지 조사되었다.학교 안팎으로 대대적인 역학조사가 시행되었고, 비둘기와 쥐 바퀴벌레, 신주머니와 수도꼭지 파이프 그리고 화단에 사는 지렁이와 천정에 낀 곰팡이까지 온갖 것이 분석되었다.조사원들이 식수대와 화장실 하수구를 들쑤시는 동안, 그녀는 학급에서 키우는 카멜레온 한 마리를 의심했다. 젖소와 사슴의 결핵이 사람에게 전염되는 경우는 간혹 있었지만, 파충류에 의한 전염은 엉뚱한 것이었기에,
준은 분수대 가장자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주변에 있는 수풀에서 간간히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그가 분수대 안쪽 벽에 달라붙은 개구리를 찾아낸 순간, 마킷이 나타났다. 그는 인사를 생략한 채, 조각을 가리켰다.“책 읽는 남자는 없군? 조각자가 남성 혐오주의자였을까?”“......... 나체의 여자 앞에서 책 보는 남자가 몇이나 있겠어요? 게이라면 모를까? 그리고 남자가 있었다면....... 여자가 옷을 벗고 책을 읽지도 않았겠죠.”준은 유치한 문제를 대하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그렇군? 그런데 왜 천사가 나팔을 부는 거지? 독
산하는 운전 좌석에 몸을 깊숙이 묻고, 주행 계기판 옆에 있는 액정화면을 응시했다. 짙게 코팅된 유리창은 사람들의 시선을 거울처럼 반사했다. 액정화면에는 카페 보안 카메라와 연결된 장면이 플레이되었다. 장수와 민이 진한 자몽 쥬스를 마시며, 대화했다. 총에 맞아서, 증발한 장수의 귀는 성형 수술을 받아, 감쪽같이 자리를 잡았지만, 예리하게 살펴보면, 귓등 뒤쪽으로 희미한 봉합선을 찾아낼 수 있다.산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장수의 행방을 추적했다. 장수에겐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고, 그 후원자의 권력은 공항 검색대를 거치지 않고, 꼬레
“자살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죠. 그런 죽음을 ‘위대한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마킷은 소수점 자리 계산을 끝낸, 회계사처럼 잘라 말했다.“무엄하군. 감히 내 앞에서 교리를 논하다니!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교황은 눈을 부릅떴다. 장님 특유의 혼탁한 하얀 눈동자가 마킷을 향했다. 마킷은 젊은 시절 시체 안치소에서 일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그 시절 그가 수습했던 시체들의 눈동자와 교황의 눈빛이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선택은 당신의 것입니다. 피의 갈증 속에서 살다가 한순간 실수로 악마로 낙인찍히든지 …. 위대한 죽음
"나의 영생 이식 비용을 댄, 사람이 …. 당신인가?”안젤로 교황의 코끝이 이사벨에게로 향했다. 콧등에 인 잔주름은 먹잇감을 찾는 승냥이 같았다.“감사를 바라진 않아요.”이사벨은 자세를 낮춰 안젤로 교황의 손을 잡아주었다. 곁에 서 있는 마킷은, 화학 반응을 지켜보는 과학자처럼, 둘의 모습에 집중했다. 영생자 둘이 만나면 무슨 대화를 하게 될까? 교황은 미간을 찌푸린 채, 시간을 끌었다.“나를 조롱하는 건가?”“왜 제가 그래야 하죠?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분이세요.”“우리?”“당신을 포함한 모든 영생자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