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양지원] 장장 20년이다. 이준익 감독이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을 영화로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박열은 이 감독이 영화 ‘아나키스트’를 제작하면서 알게 된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의 아나키스트다. 무려 2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영화 ‘박열’(28일 개봉)은 이 감독의 장인정신이 고스란히 묻어난 작품이다. 오로지 역사적 고증을 기반으로 탄생된 이 영화는 장면 하나하나에 이 감독의 노력이 담겨 있다.

“20년 전에 ‘아나키스트’를 제작하면서 처음 알게 된 인물이 박열이다. 제국주의의 심장인 도쿄에서 내각을 상대로 대법원까지 가서 투쟁한 인물이다. 박열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교과서로는 배울 수 없는 인물이었는데 감독인 내게 정말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왔다.”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인 것은 확실하나, 막상 영화화를 하려니 큰 부담으로 다가온 인물이 박열이다. “그 당시에는 박열을 영화화할 만큼 실력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가 조심스레 꺼내든 작품이 ‘동주’다. 사실 윤동주는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이라 더 부담을 느끼기도 했다.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감독으로서 매장당할 수도 있었다. 다행히도 비난은 피했으니 이제 모르는 인물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박열’에 매달리게 됐다.”

‘박열’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다. 일본 내각은 두 사람을 자신들이 꾸며낸 대역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며 ‘희생양’이 되길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박열과 후미코가 일본 내각을 쥐락펴락한다. 일본 내각의 어수룩하고 허술한 모습은 웃음을 준다.

“일본 내각을 희화화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실제로는 더 웃겼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본 내각뿐 아니라 세상 모든 권력의 꼭대기는 다 블랙코미디다. 청와대도 그럴 것이고, 백악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와 권력을 지탱하기 위한 그들의 음모적 행태는 지나고 보면 다 코미디인 것 같다.”

‘박열’은 일반적인 항일영화와 결이 다르다. 굳이 일본군을 악인으로 부각하지 않는다. 박열과 후미코를 심문하는 다테마스(김준한)는 이들의 진심과 제국주의 사상에서 딜레마를 겪기도 한다.

“일본이 다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 불합리한 권력을 자행하는 사람이 나쁠 뿐이다. 박열의 대사 중 ‘일본 권력에 대해서는 반감이 있지만 일본 민중에게는 친밀감이 든다’는 말이 있다. 반일 감정의 분노와 증오의 프레임을 깨야 한다는 생각이다.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것도 한국과 일본 관객을 위해서다. 심지어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여자 아닌가?”

자극적인 장면도 최소화했다. 영화에는 고문신도, 총격신도 없다.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에 맞서 총을 쏘고, 고문을 당하는 모습은 이미 숱한 영화에서 활용돼 왔다.

“이 영화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관동 대지진 학살 장면이 나오지만 아주 잠깐이다. 항일 운동 영화는 총을 쏴야 한다는 관습이 있다. 그 관습을 깨고 싶었다. ‘동주’에도 그런 장면이 없듯이 ‘박열’도 마찬가지다. 현란한 볼거리로 현혹하면 박열과 후미코가 지키려고 한 신념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에 자극적인 장면은 최소화했다. 자극적인 장면을 강조해서 관객들에게 분노를 강요하고 감정에 호소하고 싶지 않았다.”

이 감독은 ‘역사 전문’ 감독이다. ‘황산벌’(2003)을 시작으로 ‘왕의 남자’(2005)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평양성’(2010) ‘사도’(2014) ‘동주’(2015)까지 사극과 시대극 연출에 몰두했다.

“우리나라는 어려서부터 서양 역사를 많이 배우고 자라지 않았나.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서양 사람들은 동양 역사를 배우지 않는다. 그게 짜증이 나고, 약이 오른다. 서로의 역사에 관심이 있어야 동등한 문화적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공

양지원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