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생 22년을 채운 설경구(47)도 카메라 앞에선 “두렵다”라는 표현을 썼다. 베테랑 배우로 손꼽히지만 “연기는 한껏 뱉어내고 만들어지면 끝”이라며 “돌이킬 수 없는 작업이라서 늘 아쉽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 설경구는 그 두려움을 조금 덜어냈다. 힘 닿는 데까지 힘을 뺐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함께 농사 짓다 끌려온 남한군 ‘남복’ 역으로 여진구와 코믹 연기를 완성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풀어가는 코미디, 베테랑·똘망똘망한 두 배우의 어리바리 연기. 상반된 요소가 뒤섞인 작품에서 설경구는 모든 걸 내려놓으며 ‘서부전선’의 새로운 재미를 이끌었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다.
“안 먹고 있다. 준비 중인 작품이 있는데 살인자 역할을 맡아 살 빼는 중이다. 10kg 넘게 뺐다. 주로 걸으면서 빼는데 ‘역도산’ 이후 이렇게 많이 걷기는 처음이다.”

-‘서부전선’은 처음에 고사했다고 들었다.
“못하겠다고 했지만 늘 마음에 있었다. 그러다가 몇 년 뒤 이은주 기일에 만나 얘기가 다시 시작됐다. 정통 전쟁 영화가 아니지만 남자 둘이 확실히 끌고 가는 게 매력적이었다.”

-상대역으로 여진구를 적극 추천했다는데.
“누구나 그 역은 여진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대에 대해서 모르고, 학생 역을 어떤 20대 배우가 할 수 있겠나. 여진구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호흡은 잘 맞았나.
“나이차는 있지만 세대차는 없었다. 일상 대화를 극처럼 했다. 오죽하면 여진구가 ‘개XX’를 연습하고 다녔겠나. 스태프 앞에서 어떤 ‘개XX’의 톤이 맞냐며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일단 여진구의 목소리가 욕의 위압감을 배가시켰고 그 모습에서 세대차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나아졌지만 초반 웃음코드는 별로라는 평이 많다. 안 웃긴 장면을 웃기자고 연기하는 것도 고역이었겠다.
“그것만큼 무안한 일이 없다(웃음). 최대한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연극적인 요소와 작가의 상상력이 많이 들어갔다. 욕심이 과했던 영화치고 최선이었다.”

-코믹과 감성적인 부분이 수없이 교차한다. 힘 빼고 연기했다지만 쉽지 않을 것 같다.
“순서대로 촬영하지 않아 찍으면서도 어떻게 만들지 궁금했는데 잘 버무렸다. 캐릭터처럼 현장도 치밀하지 않아서 재밌었다. 뭔가 시행착오가 거듭되는데 그 느낌이 밉지 않았다. 예를 들어 촬영 중에 탱크 제작이 시작됐다. 참 용감한 행보였는데 완성된 후에도 작동이 제대로 안됐다. 1953년 기술을 그대로 고증했다고 본다(웃음).”

-‘서부전선’을 찍고 1년 공백이 있었다. 그 사이 ‘나의 독재자’는 흥행 성적이 저조했다. 중간에 잘 안되는 영화가 생기면 어떤가.
“허무하다. 그렇게 안 될줄 몰랐다. 스코어가 안 올라와서 처음으로 지방 무대 인사도 못갔다. 소재는 참신했는데 잘 안 통했다. 왜 안됐을까 고민해보니 재미를 못준 것 같다. 극장에 힘들어 하려고 오는 사람은 없지 않나. 그 캐릭터를 정말 하고 싶어서 했는데 일반 관객들과 거리가 너무 컸다.”

-1,000만 관객을 넘긴 ‘실미도’ 이후 사실 잘 망하지도 않고 큰 성공도 없는 편이다.
“정말 모르겠는 게 관객이다. 나도 해봤지만 1,000만 참 부럽고 대단한 성적이다. 욕망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현장에서 촬영 열심히 하는 게 내 역할이다.”

-송윤아는 이번 연기에 대해 어떤 말을 해줬나.
“둘이 연기 얘기는 절대 안 한다. 연기는 감독과 얘기하면 된다. 여진구와도 그런 얘기는 안 나눴다. 후배들에게 굉장히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선배 배우들이 조심해야 될 부분이다. 다만 ‘어셈블리’에서 송윤아 연기는 잘 봤다(웃음). 괜히 눈물이 났다.”

-차기작은 왜 살인자 역을 택했나.
“소모되는 직업이 배우다. 재료는 한정적인데 안 해봤던 캐릭터가 오면 고맙다. 어려울 것 같고 두렵지만 호기심도 있다.”

-설경구가 연기를 두렵다고 표현하는 게 신기하다.
“다시 못하고 돌이킬 수 없어서 두렵다. 뱉어내고 만들어지면 끝이다. 연기가 늘 아쉬운 것도 똑같지만 타협할 수 밖에 없다.”

-오랫동안 연기만 했는데 다른 영역에 도전할 계획은 없나.
“연출은 알면 못한다. 너무 힘든 직업이다. 욕심 있는 사람은 많이 도전하지만 나는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내 의지대로 영화를 만든다? 의지대로 안 되는 게 영화 같다.”

사진|임민환 기자

심재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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