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중략)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온몸으로 느끼는 9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폭염의 기세를 이젠 추억해야 한다는 사실에 새삼 자연의 섭리를 깨닫는다. 문뜩 올려다본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불현듯 떠오르는 시가 있어 행복해진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한 구절을 읊어본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평론을 하면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 분석하는 것이 일상이 돼버린 내게 한편의 시는 메말라 버렸을지도 모를 감성을 그렇게 소환해 주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연인들 사이에서 선물로 줬던 시집은 말 못할 감정을 대신 전달해주기도 했고, 낭만적이고 지적인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었던 훌륭한 도구가 되기도 했다. 시가 사랑받던 시대, 시의 과거는 그랬다. 하지만 먹고 살기 힘들다는 상투적인,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로 ‘시’는 차츰 우리 일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급기야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는 불편한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시가 대중에게 외면 받는 것은 시인의 잘못이라는 문단의 자조는 슬펐다. 독자가 사라져버린 시대의 시문학, 그러나 시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를 썼고 마침내 그것은 다시 부활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그 부활의 통로가 ‘SNS’라는 사실이다.

사색 할 수 있는 여유와 감성, 기다림의 미학을 수많은 정보와 편리함, 단선적인 언어가 난무하는 소통방식으로 대체해버린 스마트폰. 여기에도 역시 과유불급의 진리는 통했다. 넘쳐나는 것들에 대해 어느새 쉼이 필요했고, 손에서 놓아버렸던 작은 시집은 SNS를 통해 ‘시스타그램’, ‘시 웹툰’ 등의 새로운 형식으로 비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멀리했던 시는 그 삶의 고단함 때문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스마트폰의 익숙함으로 사라져버린 독자들은 그것으로 인해 다시 시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시 전문서점 위트앤시니컬 사진=위트앤시니컬 인스타그램 캡처

SNS에서 시작된 시에 대한 관심은 오프라인에서 시집 판매량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고 사라져버린 동네 책방은 카페와 접목된 형태로 재탄생해 커피 한잔과 더불어 시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팟캐스트 방송과 시인들의 시 낭송회 역시 많은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형태로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며 시는 또 다시 르네상스를 꿈꿀 수 있게 됐다. 바야흐로 ‘시 즐기는 시대’가 온 것이다.

교실 안에서 의미도 모른 채 해석에 급급해 그걸 외우고 시험을 봐야 했던 학창시절의 국어시간, 시는 감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험을 위한 시는 시에 대한 일종의 고문행위가 아니었을까? 이미 만들어져 있는 해석은 다양한 생각과 비평을 봉쇄시켰다. 교과서의 시를 직접 쓴 시인들조차도 그런 의미(해석)로 썼는지 자신들도 몰랐다는 웃픈 이야기가 떠오른다. 정답이 정해져 있는 시, 말이 되는가.

‘날 것 그대로 느껴야 한다’는 이시영 시인의 말대로 지금 SNS세대는 해석이 아닌 시 그 자체, 오랜만에 날 것의 매력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시 말이다.

“누구나 시를 품고 살아요. 그것을 찾아가는 거예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시, 그것을 찾아가는 가을, 꽤 멋지지 않은가. 영화 ‘시’의 대사가 오늘따라 유난히 깊이 와 닿는다.

●권상희는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와 국민대 대학원 영화방송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2년부터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방송진행 등 다양한 미디어를 경험했고, 고구려대학 공연예술복지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한 뒤 문화평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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