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김재현]1993년 8월1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시 국무회를 소집한 후 긴급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면서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진다"며 금융실명제 도입을 선포했다. 시장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한국 경제의 압축 성장 과정 속에서 가명 무기명 금융거래 등 잘못된 금융관행이 묵인돼 음성적 불로소득이 널리 퍼져 있다는 문제를 해소하는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서민금융을 위한 강제적인 법과 규제만이 능사가 아니다. 규제가 강할수록 음성적인 불법 사금융이 활개를 칠 수 있다. 정부는 서민금융 정책 뿐만 아니라 탈출구를 마련해야 한다./사진제공=연합뉴스

김 전 대통령은 첩보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밀리에 금융실명제를 준비했다. 김 전 대통령의 금융실명제는 신문 광고란에서 시작됐다. 광고란에 빼곡히 넘쳐 나던 대부업 광고를 보다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돈 거래를 막을 방법을 찾았다.

야심차게 준비했던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쓴 맛을 봐야했다. 음성적인 돈 거래를 양성화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전히 신문에는 대부 광고가 버젓이 광고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을 보좌하던 경제 참모들도 대부업과의 전쟁은 후대에도 끊이지 않을 것으로 예감했다는 후문이다.

단기적으로 자금 융통이 필요한 소비자들은 고금리라도 상관없다. 급전이 간절한 것이지 금리를 따져볼 겨를이 없다. 또 1주일, 한달 정도 돌릴 돈은 1~2금융권에서 취급하지 않는다. 채무자에게는 고금리든, 음성적이든 돈을 빌려주겠다는데 감사할 따름이다. 이런 사정에 자연스레 단기 소액 수요의 서민금융 시장이 조성됐다. 소상공인은 물론 경제학 교수, 공무원, 대기업 사업가 등 고객층도 다양한다.   

최근 서민금융은 최고금리 인하 등 규제 강화로 자괴감에 빠졌다. 정부는 서민금융 지원 강화를 위해 카드수수료와 금리 인하, 부채탕감 등 포용금융 3종 세트를 내놓았다. 내년 1월부터 법정 최고금리를 24%로 인하한다. 이를 통해 연간 293명이 연간 최대 1조1,000억원의 이자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이다. 과도한 이자 장사로 인해 서민들의 빚 부담이 커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저해한다는 이유다.  

돈을 간절하게 원하는 수요가 있는 곳이라면 공급은 마땅히 따라온다. 시장의 원리를 무시한 정책이나 규제 강화는 부작용이 따른다. 금리 인하로 인한 저신용자 배제 현상이다. 금리를 낮추다보니 중소사업자에 대한 소액 단기 융자 보다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에게 저리로 대출하는 편이 돈 되는 장사다. 서민들을 외면할 수 밖에 없다.

경제적 취약계층에서 돈을 못 빌려 겪는 고통이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될 수 밖에 없다. 자영자들이 돈을 못 빌리니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리게 된다. 정부가 야심차게 내놓은 서민금융 지원 강화 정책이 오히려 고금리와 불법 대부업을 부축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시장을 이기는 정책은 없다. 강제적인 법과 규제만이 능사가 아니다. 규제가 강할수록 음성적인 불법 사금융이 활개를 칠 수 있다. 정부는 서민금융 정책 뿐만 아니라 탈출구를 마련해야 한다.

서민 채무자들이 가장 유리한 대출 선택을 할 수 있게 하거나 낮은 금리로 갈아타도록 유도하는 공공성을 갖춘 통합 시스템이 필요하다. 서민금융진흥원이 그 기능을 수행할 만 하다. 서민금융진흥원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던 미소금융, 햇살론, 바꿔드림론 등 서민금융 상품을 통합 관리하고 있다.

한가지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대부업에게 막혀있는 서민금융진흥원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일이다. 대부업의 기능과 역할을 탑재한다면 진정한 서민금융 컨트롤타워가 될 수 있다. 채무자들은 급전이 필요할 때 정책금융 뿐만 아니라 금리를 비교해보며 자신에게 맞는 단기 소액 대부 대출을 선택하게 된다면 금리는 자연히 인하를 유도하는 효과를 얻는다. 서민금융 시장도 음성에서 양성으로 나오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 돈을 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채무자들이 빚을 갚고 정상적인 생활과 자활과 재기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돼야 한다. 서민금융 시장을 면밀히 살피고 제도적 보완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의 진심어린 소통이 절실할 때다.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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