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이성봉] 햇빛은 소중하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18개월을 지내면서 느꼈다. 평소 볕이 내리쬐는 날이 거의 없다. 비가 안 오는 날보다 오는 날이 더 많다. 어쩌다 비와 구름 없는 날이면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책을 읽는다. 오랜만에 찾아온 하늘이 내려준 여우볕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는 비 오는 날이 평상시이고, 해가 보이는 날은 기분 좋은 날이다. 아일랜드 감독 에이슬링 월쉬는 이러한 정서를 시나리오 바탕에 깔았다. 영화 ‘내 사랑(원제 Maudie)’은 캐나다 국민화가 ‘모드’의 삶과 사랑, 그림에 대한 이야기다. 캐나다 배경에 흐르는 아일랜드 감성은 장애와 가난을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모드에게 남편 에버렛이 얼마나 소중한 볕이었는지 담담하게 비춘다.

 

사진 = 영화 '내 사랑'

모드(샐리 호킨스)는 선척적 관절염으로 걷기 불편하다. 친오빠로부터 버림받아 이모집에 얹혀살지만 구박받기 일수다. 독립을 꿈꾸던 모드는 가정부를 구하는 생선장수 에버렛 루이스(에단 호크)를 찾아가 일하기 시작한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에버렛과 몸이 불편한 모드는 함께 살며 서로에게 물들어간다.

영화는 제41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60회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 등 수많은 영화제에 초청됐다. 특히 ‘내 사랑’은 제35회 밴쿠버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대중이 평가하는 로튼토마토 신선도지수에서 93%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원제 Maudie와 다르게 국내에는 ‘내 사랑’으로 개봉했다. 사랑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제목이다. 그래서 아쉽다. 이야기 속에는 모드의 가정환경, 예술적 면모 등 다양한 요소가 들어있지만, 멜로 영화로 포장했다. 그렇다고 원제가 완벽한 제목도 아니다. 영화는 모드가 에버렛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이를 한 사람만의 이야기처럼 보여주는 것은 충분치 않다.

 

사진 = 영화 '내 사랑'

영화 ‘내 사랑’은 모드 루이스(1903~1970)의 삶을 그린 실화 영화다. 모드는 관절염으로 걷기 힘들지만 언제나 당당했다. 자신을 버린 오빠와 비인격적 대우를 하는 이모 밑에서 자랐지만 기죽지 않았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어릴 적부터 계속 그림을 그렸다. 가정부로 에버렛을 만났지만 주도적으로 결혼을 이끌었다. 모드는 단 한 번도 환경에 굴복해 의지가 굽혀진 적이 없다.

에버렛은 외딴집에서 살며 생선과 장작을 팔아 생활한다. 건강한 신체와 좋은 기술을 가졌지만 괴팍한 성격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없다. 그는 단 한 번도 타인과 인간적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진 = 영화 '내 사랑'

"사람들은 당신을 싫어해요, 하지만 난 좋아해요"

몸이 약하지만 강한 정신력을 가진 여자와 정서적 결핍이 있지만 신체 건강한 남자는 퍼즐처럼 맞아 들어간다. 에버렛은 걷기 힘든 모드를 손수레에 태운다. 모드는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에버렛에게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가족이 없는 에버렛에게 모드는 아내가 되어주었고, 에버렛은 모드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 되어준다.

그렇다고 이들이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에버렛은 폭력과 거친 말투로 모드에게 상처주기 십상이다. 견디다 못해 모드는 집을 나서려 하지만 따뜻하게 반겨줄 가족이 없어 에버렛에게 다시 돌아온다. 에버렛 입장에서 보자면, 새로 일하기로 한 가정부가 말도 없이 거실 벽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화가 날 수밖에. 마을 사람들은 괴팍한 생선장수가 절름발이를 몸종(love slave)으로 집에 들였다며 따가운 눈총을 보낸다. 그럼에도 옆에 있으려는 사람이 모드뿐이라 에버렛은 비난을 감수한다.

 

사진 = 영화 '내 사랑'

"당신은 내가 필요해요"

두 사람은 결핍을 채워주는 관계다. 모드의 그림은 결핍이 채워지면서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예고편에서도 등장한다. 음악으로 가득 찬 거실에서 모드는 에버렛 발등 위에 올라가 춤을 춘다. 모드의 그림이 알려지며 두 사람은 유명해지고 언론 인터뷰까지 한다. 사람들은 에버렛이 뛰어난 예술가 아내 덕을 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감독은 춤추는 장면을 통해 그 예술가의 뛰어난 작품 뒤에는 발이 되어주는 한 남자가 있다고 말한다.

 

사진 = 영화 '내 사랑'

에이슬링 월쉬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10년 넘게 준비했다. ‘내 사랑’은 한 사람 인생을 들춰보는 영화가 아니라 그 인생을 녹여내는 한 장면 한 장면을 수집한 영화다. 모드와 에버렛이 거니는 공간이 모두 그림이 된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모드에게 그림은 자기 감정의 단면을 시각화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모드를 닮았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은 감독은 인생 이야기가 아니라 한 장면을 포착해 보여준다. 우리 삶에서 기승전결을 구분할 수 있는가. 그저 시작과 끝이 있을 뿐이다. 좋은 영화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릴 때 억지스러운 기승전결 없이 인생 한 구간을 툭 잘라내 그대로 보여준다.

감독은 촬영을 위해 세트장을 거부하고 넓은 들판에 작은집을 지었다. 실제 노바스코샤 미술관에 전시된 모드의 집을 본떠 재현했다. 드넓은 공간에 3.9mX4.11m밖에 안 되는 집은 묘한 풍경을 만들었다.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는 곳에 그 집만이 온기가 흐른다. 부족한 것이  많은 모드와 에버렛은 서로에게 온기가 되어주었다. 떠나는 모드를 보며 에버렛은 “내가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라고 자문한다.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는 모드는 그에게 이 말을 건넨다.

"난 사랑받았아요"

사진 = 영화 '내 사랑'

이성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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