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필 NH투자증권 수석연구원

국민연금 같은 공적연금에 대한 불신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금부터 대략 20여년 전이었던 1990년대 후반 연금에 대한 불신이 매우 고조된 적이 있었다. 

이유는 정부가 마음대로 연기금에 손을 대서 증권파동에 유용을 하거나, 국민연금 직원들이 연기금을 이용해 주가조작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일었기 때문이다. 내가 넣은 돈을 정부나 직원이 마음대로 유용했으니 불신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꽤나 긴 시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공적연금에 대한 불신이 있는 건 마찬가지다. 물론 이유는 다르다. 

과거 불신의 원인이 정부의 입맛대로 연기금을 유용하려는데 있었다면, 최근 불신의 이유는 연금자체의 고갈에 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전됨과 동시에 연금을 수급하는 사람들 역시 빠르게 증가하면서 연금이 고갈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연금을 붓더라도 과연 나중에 연금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연금을 불신하게 만드는 셈이다. 

아직 이 같은 의문이 말끔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국민연금 납부를 그냥 세금 내는 셈 치며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게 사실이지만 연금자체의 필요성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사실 2000년이 넘는 연금의 역사에서 최근처럼 연금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개인과 사회 모두가 연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불과 100여년 남짓에 불과하다.

초기 연금의 형태는 고대 로마시대에 존재했다. 상업과 군사적 요충지, 비옥한 영토, 노예 등을 차지하기 위해 정복전쟁이 활발했던 당시 국력의 전부이자 나라의 생존을 담보했던 것은 군사력이었다. 따라서 너나 할 것 없이 군비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군사력을 강화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당시 지중해 도시국가 중 하나였던 미르토스는 군사력 강화를 위해 시민들로부터 강제로 군비를 징수하는 대신 이를 나중에 연금형태로 갚았다고 한다. 이 것이 연금의 초기형태다.

이후 중세시대를 지나면서 신부나 군인, 공직자, 귀족 등 일부 특권계층을 위한 연금이 부분적으로 존재했으며, 근대 들어서는 영국이 해군력 강화를 위해 퇴역한 해군장교에게 종신토록 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후 일부 특권층이 아닌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연금제도는 19세기 후반 독일에서 시작됐다. 독일의 철혈 재상으로 잘 알려진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잇단 전쟁에서 승리한 후 내부세력의 통합과 안정을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공적연금을 고안해 냈다. 하지만 연금을 생각해 낸 비스마르크에게는 다소 검은 의도가 있었다.

“늙었거나 병들었을 대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기면 더 행복해 하고 더 유순해져서 다루기가 쉽다. … 2억 마르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들 한다. 3억 마르크가 든다 해도 나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 국가는 그들에게 요구하기도 하지만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꼭 이해시켜야만 한다.(‘고령화 쇼크’, 박동석 외)”

후에 비스마르크가 고백한 연금을 도입하게 된 이유 중 일부분이다.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돈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거나, 국민이 국가에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야 한다와 같은 다소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연금인 셈이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연금을 탈 수 있는 나이를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시대에도 높은 70세로 정해 놓기도 했다. 

시작이 불순하든 어떻든 간에 연금은 이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됐다. 먼저, 연금없이는 근 1세기만에 배 이상으로 늘어난 삶의 길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여러 통계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고령자들이 전세계 많은 나라 중에서도 유독 가난하고 오래 일하는 이유는 바로 연금제도의 부실 때문이다. 

노인인구의 채 반도 국민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받고 있는 사람의 평균금액도 월 30만원대 초반에 불과하다. 그나마 20년 이상 납입한 사람은 89만원 정도의 연금을 받고 있다. 공적연금만으로는 노후생활이 불가능한 현실은 거꾸로 개인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사적연금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사회가 늙어가는 고령화의 진전 역시 연금의 필요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고령화와 연금이 굳이 무슨 관계가 있냐 할 지 모르지만, 노인인구를 부양할 젊은 인구가 부족해진다는 점은 늙어가는 사람 입장에서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단적인 예로 우리 부모님 세대에 흔했던 5남매, 6남매를 둔 부모와 요즘 흔한 한 명의 아이만을 둔 부모가 자식들로부터 용돈을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각각의 자식들이 20만원씩만 드린다해도 5남매를 둔 부모는 100만원의 용돈을 받을 수 있지만, 한 명의 자식을 둔 부모는 겨우 20만원에 그친다. 가정이란 최소의 경제단위를 예로 들었지만, 이를 사회로 확대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노인을 부양할 젊은 세대가 줄어든다는 점은 노인이 스스로를 부양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증가시키는 요인이다.

게다가 고령화에 따른 저성장은 그 한 명의 자식이 20만원을 드리는 것 조차도 빠듯하게 만들고 있다.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로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면서 젊은 세대들이 부모는 고사하고 자기 한 몸 가누기 힘겨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더욱 연금을 통한 스스로의 준비가 절실한 부문이다. 

혹자는 지금 당장 살기도 팍팍한데 노후준비에 쓸 돈이 어딨냐 하겠지만, 노후준비를 하지 않은 데 따른 기회비용이 매우 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노후준비 하지 않으면 인생 말년에도 일자리 찾느라 노심초사 할 수도 있으며, 생활수준을 크게 낮춰 궁핍한 생활을 할 수도 있다. 젊은 시절 노후준비에 돈을 쓰지 않은데 따른 엄청난 기회비용인 셈인다. 지금 당장 어렵지만, 생활비 곳곳에서 조금씩 줄여 부은 연금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글/ 서동필 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수석연구원 

서동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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