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영화 '행복을 찾아서'

[한국스포츠경제 이성봉] 아침에 눈을 떴다. 평소라면 이미 출근을 했을 아버지가 TV를 보고 계신다. 이상했지만 묻지 않았다. 학교를 갔다 왔지만 여전히 그 자리셨다. 그날 이후에도 한동안 밖을 나가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직장을 잃었다고 했다. 

수많은 아버지가 실업자가 된 때가 있다. 90년대 후반 IMF 구제 금융 사태는 우리 가정을 생계 위기 속에 몰아넣었다. 나라가 외환이 부족해 다른 나라에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상태였다. 1998년 한 해 동안 다섯 개 시중 은행을 비롯해 6만 8,000개의 회사가 사라졌다. 10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노숙자도 넘쳐났다. 어린 기억으로 '참 아픈 시기'였다.

최근 재개봉한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그때를 떠올리게 한다. 아픈 시기에 성공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뉴욕 월스트리트의 신화적인 인물인 크리스 가드너의 자전적 영화다. 20세기 판 아메리칸드림이랄까. 80년대 샌프란시스코에 노숙자였던 그는 월스트리트로 입성해 불우한 환경과 흑인이라는 인종적 핸디캡을 극복하고 이후 ‘가드너 리치 앤드 컴퍼티’ 회장이 된다.

크리스 가드너(윌 스미스)는 한물간 의료기기를 판매하는 세일즈맨이다. 매일 병원을 다니며 최선을 다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결국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한다. 견디지 못한 아내 린다(탠디 뉴튼)는 집을 떠난다. 아들 크리스토퍼(제이든 스미스)와 함께 길거리 노숙자가 된 가드너는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만나게 된다.

 

사진 = 영화 '행복을 찾아서'

"‘Happyness’가 ‘Happiness’로 변하는 과정"

1980년대 미국은 경기침체기였다. 70년대 베트남 전쟁에 군사비를 쏟아부은 미국은 예산 적자에 허덕였다. 적자는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87년도에는 연방정부의 적자가 1500억 달러에 달했다. 인플레이션 억제에도 실패하면서 실업률까지 높아졌다. 악순환에 빠졌던 미국 경제 속에 가드너의 가족들은 월세를 낼 돈이 떨어져 길거리에 나앉는다. 영화는 이 남자가 극도로 빈곤한 상황을 개인의 능력을 통해 어떻게 극복하는지 조명한다. 

행복추구권(The Pursuit of Happyness). 이 영화의 원제다. 여기서 ‘Happyness’는 ‘Happy’의 명사형으로 ‘Happiness’가 올바른 철자다. ‘y’는 오타가 아니라 영화 속 가드너의 아들 크리스토퍼가 다니는 어린이집 담벼락에 쓰여 있는 글자다. 영화 도입부에서 가드너가 매번 철자가 틀렸다며 불만을 터뜨리지만 고쳐지지 않는다. ‘나(i)’의 행복이 아니라 ‘너(you)’의 행복만 있는 사회에 불만을 표하는 개인의 서글픈 외침이랄까. 아내 린다가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자 가드너는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문 속 ‘행복추구권’을 떠올린다. 가드너는 “행복을 추구한다고 적어놓은 건 행복을 성취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토마스 제퍼슨도 알았다는 걸테지”라고 비관한다. 그러다 영화 말미에는 증권사 취업에 성공한 가드너가 “내 인생에서 이 순간은 행복이라고 불린다”라며 달라진 시선을 드러낸다. 결국 영화는 가드너라는 인물을 통해 ‘Happyness’가 ‘Happiness’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힘든 주인공이 고난의 문턱을 넘어 희망을 마주하는 것. 영화가 비추는 조명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행동을 통해 결말에 도달하는가. 영화는 그 과정을 아프게 그린다. 경제적 위기 속에 일가족들이 겪어낸 고통을 잔인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관객들은 자신의 경험을 소환하며 같이 아파한다. 고통을 공유하던 관객들은 희망의 빛이 보이는 시점부터 마음을 놓고 영화 제목처럼 ‘행복을 찾았다’라는 기분을 느낀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 윌 스미스와 실제 그의 아들이 함께 부자 역할을 했다는 점 등은 감동에 크게 기여한다. 이러한 이유로 이 영화를 인생영화로 꼽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 = 영화 '행복을 찾아서'

크리스 가드너는 강한 의지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개인의 능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축구로 치면 패스 한 번 받지 않고 개인기만으로 골을 넣은 선수다. '행복을 찾아서'는 2006년 개봉 당시 관객들은 감동케 했지만 비평가들에겐 그다지 호평받지 못했다. 영화가 빈곤층의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비판해온 월스트리트의 탐욕은 보이지 않고,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시기에 한 흑인의 경제적 성공을 도운 순진한 백인들이 등장한다. 흑인의 성공 스토리지만 결국 백인의 도움을 은근히 드러내며 교묘한 차별이라는 비판을 낳았다. 게다가 영화에서 등장하는 빈곤층에게는 정부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다. 80년대 정부의 정책 실패로 무너진 경제 상황을 국민들이 떠안았다. 영화는 당시 상황을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에 국가는 없다. 그가 어렵게 사는 이유, 그토록 고생했던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현재 상황과 극복하는 과정만 나온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영화처럼 사회문제를 개인문제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IMF 사태 당시 아버지의 실직은 아버지의 능력 문제만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난 사람들 또한 그 개인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서점가에는 ‘자기계발서’ 열풍이 불었다. 국가의 위기를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무책임한 주장은 갑자기 무너진 사람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어려운 시기에도 성공을 일군 소수의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하는 방법’이었다. 이 열풍은 사회적 상황을 ‘내 문제’로 보게 만들었다. 자기계발서 속 사람들은 위기에 빠진 사람들에게 ‘꿈’을 가지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강조하며 불평과 불만을 입막음했으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기형적인 문장까지 만들어냈다. 안타깝게도 '행복을 찾아서'는 '자기계발서'와 같은 교훈을 준다. 

"사회는 없고 개인만 남은 영화"

월스트리트의 성공한 인물을 다룬 또 다른 영화가 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영웅담은 아니다. 월스트리트의 증권사에 입성한 조던 벨포트라는 인물이 갈수록 부를 축적하면서 쾌락에 물들며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던 벨포트는 온갖 향락의 덫에 빠져들다 결국 불법자금 및 금융시장 질서 교란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되지만 되려 더 화려하게 컴백한다.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던 능력과 경험을 그에게 듣기 위해 전 세계 강연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 = 영화 '행복을 찾아서'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마지막 장면은 이 같은 성공스토리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킨다. 조던 벨포트는 전 세계인들에게 자신의 ‘돈 버는 방법’을 강연한다. 조던 벨포트는 강연 도중 펜을 하나 들고 청중들에게 “이 펜을 제게 팔아보세요”라고 말한다. 이때 벨포트를 비추던 카메라는 청중들을 비춘다. 금융 범죄를 저질렀던 사람의 성공스토리를 듣기 위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청중들을 풀샷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쾌락과 탐욕으로 눈먼 주인공을 보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던 관객들은 이 장면으로 인해 갑자기 서늘함을 느낀다. 감독은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당신은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가 놓친 부분이다. 영화는 그 영화만의 독특한 시각이 즐거움을 준다. 대사, 카메라 구도, 이야기 구조 등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영화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독특한 시각 혹은 개성을 통해 영화는 “당신은 어떤가요”라는 질문을 던진다.‘행복을 찾아서’는  특별한 사람의 인생을 다루면서 흔한 끝맺음으로 질문 하나 던지지 못했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세일즈맨’,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등을 연출한 세계적인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는 이렇게 말했다.

"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난다. 
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사진 = 영화 '행복을 찾아서'

이성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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