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베벌리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 75회 골든글러브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는 수상 가능성이 농후했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대신 작품상을 수상한 ‘쓰리 빌보드’였을까? 단언컨대 이번엔 이런 이변조차 무색해졌다.

바로 레드 카펫을 장식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블랙 웨이브’가 시상식의 시작이자 정점이었고 끝이었다.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자리인 만큼 스타들은 눈에 띄는 스타일링을 위해 오랜 시간 전부터 온 정성을 다해 준비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개성 넘치는 스타일을 포기하고 ‘블랙’ 컬러를 통해 하나의 목소리를 전 세계인들에게 전했다.

지난해 할리우드를 충격에 빠트린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 스캔들이 몰고 온 파문은 레드카펫의 볼거리 대신 어둠 속에 묻힌 목소리를 양지로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미투 캠페인’(#Me Too·나도 당했다는 의미)을 통해 자신의 성추행과 성폭행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성폭력 고발 운동을 시작으로 올해 1월 1일 발족된 ‘타임즈 업(Time’s Up)’은 미국 내 성폭력과 성차별을 근절시키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 단체는 변호인단을 조성하고 1300만 달러의 기금을 마련하여 성폭력 피해자들의 법률 지원을 돕고자 한다. 그 중심에 오프라 윈프리, 제니퍼 애니스톤, 애슐리 주드, 메릴 스트립 등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들이 다수 포진돼 있다.

‘타임즈 업’ 배지를 제작한 리즈 위더스푼, 그리고 그 배지를 착용하고 블랙 드레스로 뜻을 같이 한 많은 스타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받는 엄청난 몸값이 단지 전 세계 시장을 상대로 계산된 상업적인 가격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사회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고 행동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서 몸값에 어울리는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물론 모든 것을 돈으로 재단할 수는 없지만).

LA(미국)=UPI 연합뉴스

그들에게 매겨지는 프라이스(Price)에는 분명 사회적 밸류(Value_가 포함 된 것이다.

할리우드의 ‘블랙 웨이브’를 보면서 오버랩 되는 사건이 있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종결돼 버린 고 장자연 사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유서가 전부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가해자로 지목된 유력인사들은 수사과정에서 교묘히 법망을 피해 나갔다. 피해자지만 사회적 약자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양지로 발걸음을 떼기 힘들 때 ‘죽음’ 으로 내몰리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은폐되고 있는 비루한 현실인지도 모른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남성들의 힘에 맞서 진실을 말하려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간은 끝났다"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평생공로상인 세실B. 데밀상을 수상한 오프라 윈프리의 수상 소감이다.

부조리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 우리는 아직도 요원한 일일까? 언제쯤이면 타임즈 업(그런 시간은 끝났다)을 외칠 수 있을까?

●권상희는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와 국민대 대학원 영화방송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2년부터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방송진행 등 다양한 미디어를 경험했고, 고구려대학 공연예술복지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한 뒤 문화평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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