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영화 '원더풀 라이프'

[한국스포츠경제 이성봉] "당신 인생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단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겠습니까?”

6개월 간 500명에게 물었다. 양로원, 노인들이 많은 거리, 회사 밀집 지역, 대학 캠퍼스 등 다양하게 찾아다녔다. 그러다 만난 한 할머니는 어린 시절, 오빠 앞에서 춤을 췄던 기억을 선택했다. 춤을 보여달라고 말하자 “기억이 잘 안 나는 데요”라면서 수줍게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색하지 않게 매일 그 춤을 췄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동작을 기억해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할머니는 더 많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이 할머니는 영화 ‘원더풀 라이프’에 출연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금은 일본의 거장이 된 감독이 처음 각본을 쓴 작품이다. 그는 다큐멘터리 PD 출신답게 자신의 역량을 영화 속에 적절히 녹여냈다. 사후 세계를 다룬 이야기에 판타지를 깔고 다큐 형식으로 매만져 기이한 감정을 만들어냈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기 전 중간역 림보에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일주일 동안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골라야 한다. 림보의 직원들은 그 추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 그들을 영원으로 인도한다. 

 

사진 = 영화 '원더풀 라이프'

첫 장면은 신묘하다. 종소리가 울리면서 열려 있는 문 사이로 사람이 들어온다. 빛은 눈부시고 사람은 명확하지 않다. 햇살처럼 쏟아지는 빛 사이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림보’에 잠시 머물기 위해  들어온다. ‘원더풀 라이프’는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주일 동안의 이야기다.

 

사진 = 영화 '원더풀 라이프'

“당신은 어제 돌아가셨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영화 초반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다. 카메라 앵글이 그렇다. 죽음 뒤 림보에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정된 카메라로 인물들의 상반신만 담는 미디엄숏으로 담는다. 림보 직원이 질문하더라도 카메라는 인터뷰이(interviewee)만을 비춘다.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럽다. 아니 연기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상당수는 아마추어다. 500명의 인터뷰 대상 중 10명이 영화에 그대로 출연했다. 앞서 이야기한 할머니 또한 마찬가지다. 감독은 대본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 달라 요청한 뒤, 순간의 표정과 행동, 이야기하는 도중에 새롭게 추가되거나 편집되는 기억 등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다. 사후 세계라는 거대한 픽션을 무대로 썼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화들은 다큐멘터리다. 감독은 “영화 초반에 나오는 회상 장면은 대사를 말하는 배우, 실제 추억을 말하는 배우, 실제추억을 말하는 일반인들의 인터뷰를 섞어서 편집했다. 그들이 말하는 추억에도 본인의 연출과 각색, 오류 등이 섞여 있지요"라고 말했다. 감독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억의 허와 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의 감정을 다큐멘터리로 찍고 싶었다“

 

사진 = 영화 '원더풀 라이프'

다큐멘터리처럼 진행하던 영화는 중반 이후 반전을 보인다. 내내 인터뷰이만을 비추던 카메라는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인터뷰어 즉, 죽은 이들의 말을 듣고 영화를 만들어주는 림보 직원들을 비춘다. 이 순간 영화는 다큐에서 극으로 바뀐다. 감독이 말한 ‘픽션’과 ‘다큐’가 충돌하는 이 장면은 앞선 다른 장면들과 전혀 다른 구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직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타인의 죽음과 소중한 기억을 듣던 관객들에게 카메라 전환을 통해 질문을 던지며 기이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 같은 방식에 대해 묻자 감독은 "나는 내 영화가 픽션와 다큐의 경계를 부수게 되길 바란다. 픽션과 다큐가 충돌할 때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라고 답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은 무엇입니까“

 

사진 = 영화 '원더풀 라이프'

카메라가 반전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던 림보 직원 모치즈키 타카시(이우라 아라타)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일본의 태평양 전쟁 때 부상을 입고 귀국했다가 22살에 사망했다. ‘소중한 추억’을 선택하지 못해 50년이 넘도록 림보에 머물러 있다. 모치즈키는 와타나베라는 노인이 ‘소중한 기억’을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비디오테이프 70개를 가져다준다. 그 테이프 속에는 와타나베의 삶이 요약된 장면이 담겨있다. 고민 끝에 와타나베는 아내와 결혼 후 40년 만에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 공원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순간을 선택한다. 이때 와타나베와 테이프를 함께 보던 모치즈키는 표정이 굳어간다. 화면 속 와타나베의 아내가 모치즈키의 약혼자 쿄코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 이 장면은 영화의 첫 클로즈업이다. 영화는 카메라 반전과 더불어 영화 최초의 앵글로 효과를 극대화한다. 모치즈키의 감정을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중한 기억을 50년 만에 고르며 모치즈키는 이렇게 말한다.

“50년이 지나서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어. 정말 멋진 일이야”

 

사진 = 영화 '원더풀 라이프'

영화는 사실적인 이야기와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말을 건다. 위에서 같은 듯 다른 두 가지 질문을 언급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은 무엇입니까”, “당신 인생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단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질문 간 차이가 느껴지는가. 질문을 받은 이들은 일주일간 고민하고 선택한 뒤 그 기억을 제외한 나머지 기억을 잊는다. '영화를 관통하는 질문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고민 없이 후자라고 답하겠다. 영화는 ‘고르는 과정’을 조명한다. ‘선택’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이미 천국이다. 단 하나의 기억만을 남기고 제외하는 과정 말이다. 천국에 가기 직전 이 과정을 거친 인물들은 해맑다. 무엇을 선택했건 과정에서 이미 그들의 인생은 이미 ‘원더풀’하다.

“'선택'이 아닌 '선택하는 과정'에 대해 관객들에게 질문하며”

앞서 언급한 과정들은 관객을 ‘원더풀 라이프’로 끌고 들어간다. 이제 막 이승을 떠난 이들이 눈부신 빛을 통과하는 첫 장면은 영화로 들어가는 입구다. 다큐멘터리 형식은 사후 세계를 둘러보게 하고, 카메라 반전으로 극적 효과를 만들며 관객에게 질문한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그 흔한 “당신은 어떤가요”라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질문하는 영화는 극장 밖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세일즈맨’,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등을 연출한 세계적인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는 말한 ‘극장 밖에서 시작하는 영화’로 ‘원더풀 라이프’는 매우 적절한 예다. 극장을 나서면서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한다. 영화에 참여했던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영화가 삶 속에 들어왔다고 느끼며 마지막 장면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빈 의자의 주인은 관객이다.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는 그 의자에서 당신은 어떤 기억을 고르겠습니까”

사진 = 영화 '원더풀 라이프'

 

사진 = 영화 '원더풀 라이프'

이성봉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