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 or No?

선택권이 있을 줄 알았다. 열정과 패기로 시작된 직장생활,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고 했던가. 인생은 회사라는 조직에 저당 잡힌 채 열정의 온도는 곤두박질 쳐 급속히 냉각돼 버렸다. 마치 요즘 한파처럼. 은퇴하신 아버지처럼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자식 생각하며 버텨내야 하는 건가 고민스럽다. 그런 삶이 그저 숙명이려니 받아들이기에는 한숨 밖에 나오질 않는다.

얼마 전 만났던 후배의 고민은 한 살 더 먹은 만큼 안타깝게도 그 깊이가 더 깊어진 듯 했다. 선배로서 뭔가 그럴듯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싶단 생각은 일찍이 접었다. 막연한 조언 따위 위로조차 되지 않는 시대이기에 묵묵히 들어주는 것만이 최선일 뿐.

한숨과 푸념, 그리고 카톡 소리가 끊임없이 오버랩 되는 동안 후배는 연거푸 “미안해요. 업무 때문에”를 반복한다. 퇴근 후에도 업무는 현재진행형. 무거운 표정이다.

상사의 업무 관련 카톡에 무조건 예스 해야만 하는 ‘넵병(病’)은 어느새 직장인들의 직업병이 돼버렸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카톡은 매너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즉시 확인하지 않는 것이 비매너다. 퇴근 후에도 직장인 10명중 7명 이상은 SNS를 통해 업무를 본다. 퇴근 후 스마트폰을 이용한 초과 근로시간이 평일 1.44시간, 일주일 10시간이다. 일하기실어증, 직장살이, 시상사, 회사 가기 실어(싫어)증, 사무실지박령, 죄송응답증, 카톡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디지털 이명(耳鳴) 등 넵병 관련 신조어들은 굳이 자세히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단어가 주는 느낌이 동일하다. ‘카톡강박증’에서 비롯된 피로감을 제대로 토로할 수 없는 현실을 위로 받기 위한 아픈 몸부림이다. 화병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병이듯 회사병을 뜻하는 신조어 ‘횟병’ 역시 이곳에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

직장이라는 조직 내에서 ‘NO’는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해석되어 사용 불가의 언어가 된 지 오래다. ‘넵’ 이 한음절의 단어는 충성과 순응이 내포된,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간편하게 포장된 리액션이다. 다양성 운운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넵병은 선택권을 차단시켜 버렸다. 기계적인 예스맨 강요하는 조직문화가 낳은 많은 신조어들은 ‘을’의 입장일 수밖에 없는 대다수의 공감을 얻고 있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리라.

지난해 ‘퇴근 후 카톡 금지법’이 발의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넵병의 기세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실효성 자체에 의문이 드는 법안이라는 다수의 의견을 확인시켜 주듯 야속하게도 현실에선 그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고 있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 한 넵병은 어쩌면 영원히 치료 할 수 없는 불치병이 될지도 모르겠다. 직장인들에게 ‘NO’가 가능하기를 바라는 건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일까?

“희망은 사라지지 않아. 잠깐 보이지 않을 뿐이야”

모든 회사원들에게 위로가 됐던 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의 명대사다.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영화 대사가 전부였다. 입으로는 습관처럼 희망을 얘기하지만 오늘따라 이 단어가 유난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권상희는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와 국민대 대학원 영화방송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2년부터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방송진행 등 다양한 미디어를 경험했고, 고구려대학 공연예술복지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한 뒤 문화평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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