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이성봉] ‘아주심기’는 양파를 기를 때 매우 중요하다. 8월 말에서 9월 초 사이에 파종하고 10월 중순이 되면 ‘옮겨심기’를 거쳐 재배할 곳에 ‘아주심기’를 한다. '아주심기'는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다. 양파는 5월 말 이후 수확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추운 겨울을 견뎌야 한다. 차가운 칼바람과 무겁게 쌓이는 눈에도 모종이 버틸 수 있도록 말이다.

시골 동네가 싫었던 한 소녀가 있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 자신의 삶을 ‘아주심기’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쉽게 풀리지 않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진상 손님으로 넘쳐나 항상 지친다. 임용고시에 응시했지만 남자친구는 붙고 자신은 떨어졌다. 결국 차가운 칼바람과 눈이 무겁게 쌓이는 계절에 소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임순례 감독이 연출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 속 주인공 혜원의 이야기다.

사진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시험도, 연애도, 아르바이트도 하나 되는 일 없는 혜원(김태리)은 버거운 도시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학창시절 오랜 단짝 친구였던 은숙(진기주)과 재하(류준열)를 다시 만난 혜원은 고향의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을 거치며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눈다.

 

사진 = 영화 '리틀 포레스트'

 

“나만 돌아왔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지긋지긋했던 시골로 다시 돌아왔다. 아니,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었다. 혜원은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고향에 대해 시간이 갈수록 다르게 느낀다. 달라진 감정은 조금씩 변하는 체감온도로 알 수 있다. 영화 초반 혜원이 추위를 타면서 잠을 설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사계절을 거치는 동안 어릴 적 먹던 음식을 해 먹고 두 친구와 어울리면서 추위를 느끼는 장면이 사라진다. 여름이 오면 혜원은 “너무너무 덥다”라고 말하지만 어느새 자급자족 생활에 적응한 농부가 되어 있다. 임순례 감독에게 주인공 혜원은 잘 재배하고 싶은 채소였는지 모른다. 혜원이 느끼는 체감 온도는 영화의 커다란 줄기다.

 

사진 = 영화 '리틀 포레스트'

혜원의 감정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요리다. ‘리틀 포레스트’는 일본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동명의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자급자족해 먹는 요리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는 청년들의 고민, 인물 간 관계에 집중하고 있지만, 요리를 하며 주인공의 감정이 흘러간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남은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수제비, 쑥을 뜯어 넣고 찐 시루떡, 밭에서 기른 채소가 어우러진 파스타, 탐스러운 아카시아꽃 튀김, 설탕을 듬뿍 넣어 조려낸 달콤한 단밤 조림 등 많은 요리가 등장한다. 그래서 ‘공복에 보면 안 되는 영화’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요리들은 수능을 마친 혜원을 두고 가출한 엄마(문소리)와 기억을 환기하는 매개다. 혜원은 엄마에게 배운 음식들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시 요리해 엄마를 이해한다.  

 

사진 = 영화 '리틀 포레스트'

“그렇게 바쁘게 산다고 문제가 해결이 돼?”

두 번째는 친구 재하다. 위와 같은 그의 말과 행동은 혜원을 움직이게 한다. 이제 막 돌아온 혜원에게 재하는 제일 먼저 찾아와  “체온을 가진 건 모두 도움이 된다"며 어린 진돗개 ‘오구’를 놓고 간다. 오랜만에 돌아온 혜원에 대한 반가움의 인사이자 엄마 없이 혼자 지낼 혜원을 달래주기 위한 따뜻한 손짓이다. 재하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귀향해 농사를 짓고 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 적어도 농사에 사기나 잔머리는 없거든”이라고 말하는 재하의 모습은 혜원에게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게 한다. 밤새 폭풍우가 몰아쳐 재하의 과수원이 엉망이 된 다음날도 그랬다. 혜원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찾아갔지만 재하는 “초보 농사꾼이 수업료 낸 셈 치지 뭐”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보탠다.

“회사에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인생을 살고 싶진 않아“

 

사진 = 영화 '리틀 포레스트'

혜원의 수능시험이 끝나자 엄마는 집을 나갔다. 엄마는 결혼 전에도 그랬다. 결혼을 반대하는 외할머니에게 “얼마나 잘 사는지 보여주겠다”고 선언하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금세 병사했고, 홀로 딸을 키워내야만 했다.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원망하던 혜원은 고향에 돌아와 요리를 하며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늘 말했다. “모든 것엔 적절한 타이밍”이 있고,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엄마는 기다리다 때맞춰 ‘아주심기’를 하러 떠난 게 아닐까. 자신의 삶을 위해. 누구도 한 자리에서 태어나 그 자리에서 죽지 않는다. 삶에서 불안한 감정과 방황은 일종의 ‘옮겨심기’다. 혜원은 도피하듯이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옮겨심기’를 마치고 스스로 결정한 ‘아주심기’를 하려 한다. 차가운 칼바람과 무겁게 쌓이는 눈에도 버텨낼 튼튼한 ‘아주심기’ 말이다. 고향에 돌아와 사계절을 보낸 혜원은 이렇게 말한다.

“포기가 아니라 선택한 거야”

 

사진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이성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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