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톤, 심쿵주의보, 교회오빠, 짝사랑, 두려움, 비밀.

기억 속 첫사랑은 그랬다. 그 오빠만 보면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갱년기에나 찾아온다는 안면홍조가 시도 때도 없이 10대인 내게 어울리지 않는 붉은 낯빛을 선사하기도 했다. 처음 경험해 보는 낯선 감정에 어찌할 바 몰랐던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건 어쩌면 이제 다신 경험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과 선물 같은 추억에 대한 감사함 때문이리라.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 ‘그해 여름손님’을 원작으로 제90회 아카데미 각색상에 빛나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열병처럼 찾아온 ‘첫사랑’을 스크린에 곱게 채색해 놓은 작품이다. 영화는 1983년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열일곱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와 스물넷 젊은 청년 올리버(아미해머)의 한여름 밤의 꿈같은 사랑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퀴어 영화라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어둡고 습한 정서 따윈 찾아보기 힘들다. 노골적인 에로티시즘 대신 탁월한 영상미와 함께 첫사랑의 순수함과 애절함으로 범벅된 아름다운 정서를 가득 펼쳐놓는다. 여름과 닮은 두 사람의 뜨거운 감성에 온전히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관객들은 세월이라는 이름으로 굳게 봉인돼 있던 빛바랜 첫사랑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퀴어 영화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매력이 아닐 수 없다. 이질감이 없기에 두 사람의 감정에 관객은 쉽게 무장해제 되고 몰입하며 공감하게 된다.

시도조차 못하면 자칫 짝사랑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 첫사랑의 속성이거늘 끝이 어딘지 알면서도 그 둘은 끝을 모르는 것처럼 뜨겁게, 그리고 용감하게 사랑한다. 엘리오의 첫사랑을 이해하고 그 경험을 기억하기를 바래주는 유토피아스런 사고방식의 아버지는 현실에서는 존재 불가능한 캐릭터일지 모른다. 동성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담긴 상징적인 인물이다. 어쩌면 커밍아웃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바람이 제대로 투영된 인물이 아닐까.

긴장과 설렘, 두려움, 열정, 이별 후의 허망함, 떨림까지 모든 감성을 섬세하게 연기해낸 보석 같은 배우 티모시 샬라메는 이 영화 최대의 수확이다. 아미해머와의 케미는 빛난다. 제대로 여행 유혹 불러일으키는 이탈리아 남부 크레마의 멋진 풍광과 귀 호강 시켜주는 수프얀 스티븐슨의 영화음악은 작품의 여백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또 하나의 훌륭한 정서다.

영화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엔딩 장면을 연출하며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엘리오는 미소를 짓다가 화를 내고는 이내 눈물을 쏟아내며 견딜 수 없는 감정의 파고를 보여준다. 마치 마법처럼 찾아온 첫사랑은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변할 때 지독한 통증을 동반하기라도 하듯. 한 여름 밤의 꿈은 안타깝게도 현실이 되지 못한다. 가혹하지만 가슴에 고이 간직하기에는 어쩌면 꿈이 더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토닥여본다.

“네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내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불현듯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그 시절 나를 대신했던 누군가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리게 만드는 ‘슈퍼 그뤠잇’ 명작이다. 사진=소니 픽쳐스 제공

●권상희는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와 국민대 대학원 영화방송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2년부터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방송진행 등 다양한 미디어를 경험했고, 고구려대학 공연예술복지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한 뒤 문화평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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