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변동진] “저는 LG를 반드시 ‘초우량 LG’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LG는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서 최고를 성취해왔던 것이 우리의 전통이었고 저력입니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지난 1995년 2월 22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회장 취임식을 갖고 이 같이 강조했다. 23년 흐른 현재 LG는 TV·생활가전을 비롯해 디스플레이, 중대형 2차전지 등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매출액 160조원 중 110조원이 해외에서 발생한다. 구 회장의 꿈인 ‘세계 초우량 기업’이 현실이 된 것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20일 오전 9시 52분 수환으로 별세했다. /연합뉴스

◆구본무 회장 타계, 평화롭게 영면…비공개 간소한 장례

LG그룹은 20일 오전 9시 52분 구 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향년 73세.

LG그룹은 “(구 회장은) 1년간 투병했다”며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평소 뜻에 따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고 발표했다. 이어 “장례는 조용하고 간소하게 치르기를 원했던 고인의 유지와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하며,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유족 측은 가족 외의 조문과 조화도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다. 생전 과한 의전과 복잡한 격식을 마다하고, 소탈·겸손한 삶을 살아온 고인의 뜻을 따르기 위함이다.

◆‘온화·강단 리더십’ 구본무 누구?…LG 글로벌 우량 기업으로 키워

구 회장은 1945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를 거쳐 미국 애슐랜드대학교를 졸업,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75년 LG화학 심사 과장으로 입사해 유지총괄본부장을 지낸 후 1980년 LG전자 기획심사 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81년 이사로 승진한 후 일본 동경주재 이사와 상무를, 1985년에는 회장실로 자리를 옮겨 전무와 부사장(1986년) 부회장(1989년)으로 일했다. 입사 20년 만인 1995년 친부인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고 회장으로 취임했다.

구 회장은 ‘일등 LG’와 ‘LG 웨이(Way)’를 모든 경영활동의 목표이자 기본 방침으로 설정했다.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 ▲인간존중의 경영 ▲정도경영 등을 통해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실제 이 같은 뚜렷한 비전과 방향은 구성원들이 LG를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키는 토대가 됐다.

아울러 경영 일선에서 사실상 물러나기 직전까지는 자동차 부품과 에너지 성장사업 기반을 마련, 미래 성장동력 사업 육성에 전력을 쏟았다. 게다가 서울 마곡에 ‘그룹 R&D 집결체’ LG사이언스파크를 조성, ‘글로벌 LG’의 두뇌를 완성시켰다.

재계 관계자들은 구 회장에 대해 “평소 재벌 총수답지 않게 소탈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였다”면서도 “경영인으로서는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강인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덕장(德將)과 같은 온화하면서도 강단 있는 리더십 덕분에 LG가 글로벌 우량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1995년 2월 22일 회장 이취임식에서 LG 깃발을 흔들고 있다. /LG

◆글로벌 LG, 디스플레이·중대형 2차전지 1위

구 회장 리더십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은 디스플레이, 통신사업, 2차전지 등이다. 그는 1998년 대규모 장치산업인 디스플레이 사업 진출을 결정한다. 당시 정부의 빅딜 논의로 반도체사업(LG반도체) 유지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구 회장은 LG전자와 LG반도체의 LCD(액정표시화면) 사업을 따로 분리해 ‘LG LCD’를 설립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1999년 5월 네덜란드 필립스사로부터 국내 민간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16억달러의 자본유치에 성공, 3개월 후 합작법인 ‘LG필립스LCD’를 출범시켰다. 이로 인해 대규모 신규투자에 따른 자금 부담을 최소화한 LG는 세계 LCD시장의 급격한 수요 증가를 적기에 대응할 수 있는 공급능력을 확보한다.

필립스와 결별한 후 지난 2008년 단독법인인 LG디스플레이를 출범한다. 이후 20년 동안 40조원 이상을 투자해 연매출 20조원이 넘는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임직원수는 1995년 경북 구미의 첫 번째 공장 가동 당시 1,100명에서 현재 3만여명으로 늘었다.

취임 이듬해인 1996년 육성한 이동통신사업도 마찬가지다. 2000년 유선사업 인수로 통신사업을 강화했고, 2010년 LG텔레콤, LG데이콤, LG파워콤 등 통신 3개사를 합병, LG유플러스를 출범시켰다. 출범 초기 시장 안착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특유의 끈기로 버틴 결과, 그룹 내 주력 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 구 회장은 그룹 부회장 시절인 1992년부터 ‘2차전지’를 주도적으로 육성했다. 그는 영국 출장에서 2차전지를 보고 사업 진출을 결정했다. 그러나 투자 및 연구개발(R&D) 과정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일각에선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 회장은 “꼭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밀어붙여 LG화학을 중대형 2차전지 부문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갖춘 기업으로 만들었다. 특히 세계 30여 완성차 업체에 공급하는 전기차 배터리 사업의 경우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각광받는다.

◆대기업 첫 지주사 전환·그룹 CI 변경, 글로벌 진출 발판

구 회장은 사업 포트폴리오뿐만 아니라 CI를 변경, 글로벌 기업에 어울리는 얼굴을 만들었다. 물론 국내에서 ‘럭키금성’이란 사명이 익숙했던 만큼 반대도 많았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CI를 바꿔야 한다며 관련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재 LG의 ‘미래의 얼굴’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도 구 회장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LG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은 ‘모범기업’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했다. 이 역시 구 회장의 결단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문어발식 순환출자에 발목 잡혀 좌초하는 기업들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아 지배구조를 개선, 2003년 3월 수직계열화에 성공했다.

재계 관계자는 “대한민국 재계의 큰 별이 졌다.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며 “생전 대기업 총수로서 가장 모범적인 모습을 보인 인물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후대 경영인들이 고인의 뜻을 잘 받들어 도전 정신을 잃지 않은, 어려운 경제에 보탬이 되는 그런 기업으로 만들길 바란다”고 전했다.

변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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