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김지호]“‘벌처 펀드’(vulture fund)로 불리는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한 짓을 바로 알아야죠. 정당한 인수합병(M&A)이 아니라 기업에 있는 재산 다 팔고, 인력 구조조정해서 이익을 남겨 떠나는 겁니다.”

한 재계 관계자는 “무조건 재벌은 나쁜 놈들이다, 재벌이 하는 일은 모두 잘못됐다”라는 생각을 버려야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이 도입한 ‘차등의결권 주식’과 ‘포이즌필’(신주인수선택권제도)과 같은 경영권 방어장치가 절실하다”면서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를 옹호하는 게 절대 아니다”고 강조했다.

폴 싱어 엘리엇 매니지먼트 회장

하지만 동물의 사체를 파먹는 독수리(벌처)처럼 엘리엇이 잔인하다는 호소도, 이러다 국내 기업이 다 문을 닫을 것이라는 겁박에도 이제 국민은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런 반기업정서는 문재인 정부 들어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왜 국민들이 삼성·현대차그룹을 비롯한 대기업을 이토록 미워하게 됐을까.

◇과도한 경영권 승계 욕심이 문제?

엘리엇이 끼어든 삼성물산-제일모직 간 합병이나 현대모비스 분할-현대글로비스와 합병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기업의 미래성장 동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3세 경영자로의 승계를 위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았다는 점이다.

지난 2015년 7월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1대 0.35 비율로 합병했다. 당시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 불리했다는 얘기가 나왔고 현재는 제일모직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의 가치를 뻥튀기했다는 분식회계 논란까지 이어졌다.

삼성 측은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는 2015년 말에 이뤄졌고,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이보다 앞선 같은 해 7월 진행돼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전혀 관련이 없다는 설명이지만, 시민단체 등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 삼성바이로직스의 분식회계가 이뤄졌다고 의심하고 있다.

현대모비스 분할 법인과 현대글로비스 간 합병 역시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ISS 등 글로벌 의결권 자문기관은 물론,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 대신지배구조연구원 등 국내 의결권 자문기관까지 개편안에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결국 현대차그룹은 모비스 분할합병을 골자로 한 지배구조 개편안을 철회하고 말았다.

◇과도한 상속세율이 문제?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에 따르면 상속액이 30억원 이상일 경우 상속세율 50%가 적용된다. 최대주주 주식에 대한 할증평가까지 더하면 최고 65%에 달한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상속세율 26.3%의 2배 수준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높은 상속세율에 따라 재벌 등 대기업이 경영권 승계를 위해 각종 편법 활용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오정근 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은 “상속율세율이 지나치게 높아 중견기업 중에서는 아예 기업을 포기하거나 팔아버리는 사례가 많다”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상속세를 내지 않고 경영권을 승계하는 방법을 자연히 고민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 회장은 “‘갑질’ ‘황제’경영은 근절돼야 하지만 지배구조 개편으로 경영권 상속을 못하게 하면 기업은 사라지고 경제도 성장 능력을 잃게 된다”면서 “갑질이나 황제 경영은 이사회나 감사위원회를 투명하게 운영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워낙 기업이 상속세를 많이 내는 데다,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대주주 지분이 크게 줄어들었다”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차등 의결권을 통해 기업이 커져도 경영 안정성을 유지시켜주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반기업정서 때문에 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오 회장은 “시민단체가 그런 의도는 아니겠지만 결국은 엘리엇과 같은 외국 투기자본 편에 서는 꼴이 됐다”고 덧붙였다.

상속세율이 문제라면 그룹을 지주회사 형태로 전환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현행 조세특례제한법은 지주회사의 주주를 상대로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주식의 양도차익에 대해 일정한 요건이 충족되는 경우 양도소득세 과세를 새로 교환받은 주식을 매각하는 시점까지 이연해주고 있다. 이 조항을 올해 말까지만 유지된다.

홍순탁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회계사)은 “지주회사로 가면 상속세를 이연 받아 나중에 낼 수 있는데도, 대기업이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이라면서 “다만 지주회사로 가면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금융사 지분을 모두 팔아야 하는 문제가 생겨 재벌이 꺼리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현재 김동연 부총리겸 기획재정부장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최종구 금융위원장 등 정부는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팔라고 연일 압박하고 있다. 보험업법 감독규정에 보유할 수 있는 계열사 주식의 가격을 매입가격(취득원가)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 기준을 3%(시장가치 기준)로 하자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제출된 상태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8.23%를 보유 하고 있다. 21일 종가 기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320조9,662억원인 것을 감안하면 약 26조4,155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은 삼성이 금융부문을 아예 포기해 매각하고 삼성전자에 전념하는 것도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대차그룹 역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 현대캐피탈·현대카드·HMC증권 등 금융계열사를 그룹에서 분리하고 결국 이를 처분해야 한다.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

◇‘정도경영’ 구본무 회장 별세...너도나도 결국은 죽는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일 별세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정도경영’은 더욱 귀감으로 여겨진다. 구 회장은 2003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LG그룹을 주력 계열사 간 분할합병을 통해 ㈜LG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계열화를 이뤄 지주회사 체제로 바꿨다. 외환위기를 경험한 구 회장이 계열사 간 순환출자와 상호출자로 한 기업이 도산하면서 그룹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에서 실행한 것이다.

공정거래법에서는 복잡한 순환형 출자를 막고 단순하고 투명한 출자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계열회사 간 수직적 출자만을 허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다 투명하고 효율적인 경영이 가능하지만 재벌이나 총수 입장에서는 순환출자 해소에 많은 추가 비용이 들어 이를 꺼려왔다.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다는 건 그룹 내에서 그만큼 자신의 세력이 약화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어려운 일을 구 회장은 15년 전에 이미 선구적으로 해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경영권을 가짐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이 크기에 재벌 총수는 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경영은 ‘지분율과 관계없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한다’는 풍토가 재계에서 자리잡아야 한다”고 전했다.

김지호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