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이현아] 아직 정의조차 완벽히 확립되지 않은 채로 “미리 준비해야만 다가올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체계 없는 구호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준비해야 할지도 모호하다. 미디어는 2016년 ‘알파고 쇼크’이후 인공지능(AI)에 우리 삶이 저당 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만 증폭시켜 놓았다. 일자리 감소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니 빅데이터, 인공지능과 로봇, 3D 프린터 등 4차 산업혁명 주요 관련 업종을 찾아라, 청년취업난이 가중되는 현 상황에서 미래학자들의 예측은 시작부터 ‘디스토피아’란 단어를 떠오르게 만든다.

최근에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강의를 하면서 불확실한 시대가 주는 불확실성에 확신을 심어주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닌가. 우리가 사는 시대가 3차 정보혁명과 4차 산업혁명이 오버랩 되는 지점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싫든 좋든 미래가 지금이라고 받아들이고 부지불식간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과 로봇의 대결이라는 미래를 가정하고 싶지 않기에 그 둘이 공존하는 영화로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고 싶다. 18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 ‘SF 장르도 이토록 아름다운 정서를 묘사 할 수 있구나’ 하고 감독의 연출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 우리말로 하자면 ‘200살 된 남자’다. 세월이 흘러 다시 본 이 작품은 단지 영화라기보다는 현실가능성에 무게감이 더했다. 영화다운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던 그 옛날과 달리 인간과 로봇의 사랑이라는 픽션이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라는 다소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가사 도우미용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앤드류는 감성과 지성, 창의력을 갖춘 로봇답지 않은 로봇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급기야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고 자유를 갈구하며 더 이상 로봇이 아닌 인간이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된다. 여기에는 무수히 많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봉사는 제 기쁨이죠’를 반복했던 로봇을 단지 노예가 아닌 가족으로 수용한 인간의 따뜻한 정서가 있다. 앤드류가 창의성을 발휘해 만든 물건에 지적재산권을 인정해주고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소유를 포기한 것도 기계에 휴머니즘을 발휘한 사람의 노력이다. 그런 이유로 앤드류는 인간다운 로봇에서 서서히 인간으로 진화한다. 아니, 변화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의 힘으로 더는 불로불사의 로봇이 아닌 인권을 인정받은 한 사람으로 숨을 거둔다.

이 영화는 언뜻 보면 앤드류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포커스가 맞춰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봇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로봇을 하위개념으로 치부하지 않았던 인간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감성 충만한 유토피아가 완성될 수 있었다.

어차피 대결구도를 만드는 건 인간이다. 그리고 한없는 호들갑스러움으로 인간의 위대함을, 또는 무한대의 걱정거리를 양산해내는 것 또한 우리들이다. 4차 산업혁명, 대결이 아닌 ‘공존’에서 해법을 찾는다면 어떨까?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시대이기에 로봇에 인간다움을 불어넣는 일이 어쩌면 더 쉬워질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저 기우이기를, 그러길 바란다.

●권상희는 동덕여대 방송연예과와 국민대 대학원 영화방송학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2년부터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방송진행 등 다양한 미디어를 경험했고, 고구려대학 공연예술복지학부 외래교수를 역임한 뒤 문화평론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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