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김재웅] 수입차에서 발발한 할인 전쟁이 국산차로도 옮겨 붙는 모양새다. 정가제에 따른 딜러 할인이 불가능한 대신, 구형 모델 가격을 동결·인하하거나 신차 가격을 낮게 책정하면서 힘겹게 판매량을 부여잡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자동차 업계 할인 경쟁이 단기적으로는 소비자에 이익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품질 저하와 과도한 옵션 등 피해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는다.

쉐보레 이쿼녹스. 동급 대비 다양한 옵션을 기본 탑재하고서도 시작가를 2,000만원대에 책정했지만, 일부 소비자들이 불만을 드러내면서 파격적인 가격 정책에도 빛이 바랜 상황이다. 한국지엠 제공

8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지엠은 7일 부산모터쇼를 통해 이쿼녹스 판매가격을 공개했다. 2,987만~4,040만원, 당초 3,000만원대 중반부터 판매될 것이라는 예상을 보기좋게 무너뜨렸다.

현대차도 이날 벨로스터 N의 시작 예상 판매가를 발표했다. 2,900만원대 후반으로, 이쿼녹스와 같이 업계 예상을 크게 밑돈 수준이다.

앞서 르노삼성자동차는 SM3 가격을 100만원 전후로 인하했다. 1,665만원에서 1,965만원으로 동급 대비 최저 가격이다. 한국지엠도 더 뉴 스파크를 출시하면서 시작가를 20만원 낮췄었다.

그 밖에도 국내 브랜드들은 연식 변경 및 상품성 개선 모델에 옵션을 추가하면서도 가격을 동결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이를 소비자에 합리적으로 제품을 제공하기 위한 조치라고 입을 모으지만, 업계 관계자들은 수입차들의 강도높은 할인 정책에 따른 고육지책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현대차는 벨로스터N 시작가를 2,000만원대로 책정하면서 예상을 뒤엎었지만, 퍼포먼스 패키지를 선택하지 않으면 낮은 출력이 적용되는 탓에 일부 소비자들 사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김재웅기자

최근 수입차 업계는 '폭풍 할인' 경쟁으로 바쁘다. 올 초 BMW와 메르세데스-벤츠가 일부 모델에 대해 1,000만원에 달하는 가격 할인을 제공한 데 이어, 아우디와 폭스바겐도 시장 복귀 선언과 동시에 경쟁에 가세했다.

수입차가 이 같이 큰 할인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는 딜러를 중심으로 하는 판매 구조 덕분이다. 수입차 브랜드는 대부분 공식 수입사가 차량을 수입해 각 딜러사에 공급하는 형태다. 수입사는 특정 가격을 고지해 판매토록 하지만, 딜러사가 자체 프로모션과 딜러 개인 인센티브 등을 이용해 가격을 조정해도 특별히 제재할 수 없다.

최근 세드릭 주흐넬 아우디 사장은 앞으로도 큰 폭의 할인으로 판매량을 늘릴 것이냐는 질문에 "아우디코리아는 차를 딜러사에 공급할 뿐이다. 딜러사가 고객에 얼마를 받는지는 우리가 간섭할 수 없는 문제다"고 답하기도 했다.

여기에 금융 프로그램도 다양해서, 소비자들의 체감 구매 가격은 수입사 공시 가격보다 크게 낮다.

신형 싼타페에서 옵션을 대폭 추가하면서도 가격 인상을 최소화한 인스퍼레이션 트림. 구매를 생각하던 소비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이미 차량을 구입한 소비자들은 불과 출시 3개월만에 나온 파격적인 모델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제공

이에 따라 수입차 시장은 올 4월 기준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18.5%나 점유하게 됐다. 일각에서는 올해 말까지 20%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반면 정가제를 시행 중인 국산차 업계는 특별한 프로모션을 제공하기 어려운 상황, 신차 가격을 무리하게라도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는 전언이다. 대리점·판매 노조 눈치를 보느라 규정을 손보기도 어렵다.

한 업계 관계자는 "수입차 브랜드는 단순 유통으로 조직 유지 부담조차 없어서 할인 판매가 손쉬운 것"이라며 "국산차를 생산하는 비용도 고비용 저생산 구조에 따라 수입차와 비슷해졌지만, 허리띠를 졸라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작년 현대차의 판매량 대비 영업이익은 1대당 69만원에 불과했다.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는 216만원에 달했다. 벤츠의 인기 차량이 주로 고급차에 쏠려있는 영향도 있지만, 현대차가 판매가를 원가에 가깝게 책정한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출혈 할인 경쟁이 결국에는 소비자 피해로 돌아갈 것이라는 우려를 숨기지 않고 있다.

우선 수입차 업계에서 기존 차주들 반발이 수면위로 드러나고 있다. 중고차 가격이 크게 떨어진다는 이유다. 할인 시기를 놓친 소비자들은 급변하는 가격 정책에 불만을 제기했다. 불과 며칠 차이로 같은 차를 수백만원 비싸게 구매한 소비자들도 속출하고 있다.

국산차 업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최근 현대차가 내놓은 싼타페 인스퍼레이션 트림이 문제가 됐다. 싼타페 인스퍼레이션은 신형 싼타페의 최상위 트림으로, LED 안개등과 패들시프트, 차음 윈도우 등 고급 사양을 대폭 추가하면서도 가격을 10% 수준만 올렸다. 일부 초기 구매자들은 출시된지 3개월밖에 안된 모델에 대한 사실상 할인 조치에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시작가를 낮추는 대신 옵션을 늘리는 방법도 늘고 있다. 꼼꼼한 소비자에게는 그리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예컨대 벨로스터 N은 시작가를 2,900만원대로 설정했지만, 퍼포먼스 패키지를 추가로 장착해야만 최고출력 270마력을 낼 수 있다. 그 밖에도 자동차 업계에는 이미 주요 옵션을 빼고 시작가를 과도하게 낮추는 판매 방식이 만연해있다. 실제 판매에도 영향이 큰 탓에, 저렴하고 좋은 제품을 제공하려는 관계자들도 아쉬워한다는 후문이다.

또 과도한 가격 경쟁은 대당 판매 이윤을 줄이게 되고, 결국 단종에 이르게 한다. 소비자들의 선택사항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호주는 이윤이 남지 않는 차종을 차츰 단종하면서 결국 자동차 산업까지 완전히 몰락하게됐다.

이미 국내에서도 이윤이 낮은 국산 소형·경형차의 위기가 가시화됐다. 기아차는 생산성 제고를 위해 모닝과 레이를 협력업체 동희오토에 위임한 상황, 한국지엠 스파크는 우수한 상품성과 적지 않은 판매량에도 끊임없는 단종설에 휘말리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소비자들은 업계 할인 경쟁이 당장 차를 저렴하게 구매한다는 점에서 이익이지만, 나중에는 결국 피해를 받는 입장이기도 하다"며 "차를 구매할 때, 표면적인 시작가 보다는 세부 사양과 옵션 사양 등을 꼼꼼히 살피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재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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