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김서연] 은행 채용과정에서 벌어진 성 차별 채용으로 국내 주요 은행의 임직원이 구속됐지만, 채용비리 재발 방지를 막기 위한 모범규준에 정작 성비를 공개하는 부분이 포함되지 않아 논란이 예상된다.

채용성차별철폐공동행동 소속 단체 회원들이 18일 오전 서울 중구 전국은행연합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날 예정된 이사회에서 처리할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 규준’에 성비 공개를 포함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9일 금융권에 따르면 전국은행연합회는 전날 각 은행장이 참석한 가운데 이사회를 열어 지난 5일 발표한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규준’을 의결했다. 서류전형, 필기전형, 면접전형, 합격자 결정, 부정한 채용청탁의 방지, 피해자 구제 등 세부적으로 규준을 정했다.

대검찰청 반부패부가 지난 17일 공개한 채용비리 유형 ▲외부인 청탁 ▲성 차별 채용 ▲임직원 자녀 채용 ▲학력 차별 채용에서 외부인 청탁, 임직원 자녀 채용에 대한 부분은 비교적 상세한 가이드라인이 나왔지만 여성·노동계가 촉구한 ‘성비 공개’는 포함되지 않았다. ‘지원자의 성별, 연령, 출신학교, 출신지, 신체조건(장애여부 포함) 등 지원자의 역량과 무관한 요소를 이유로 한 차별은 금지’한다는 교과서적인 원칙이 명시됐을 뿐이다.

일부 은행은 사전 채용비율을 설정 후 별도의 커트라인을 적용하거나 여성합격자 비율이 높게 나타나자 점수를 조작하는 등의 방식으로 성별을 차별해 지원자를 채용했다.

KEB하나은행은 2013~2016년 신입행원 채용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채용비율을 4대 1로 사전에 설정한 뒤 별도의 커트라인을 적용했다. 국민은행은 2015년도 신입행원 채용 과정에서 서류전형 결과 여성합격자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자 남성 지원자 113명의 등급점수를 높여 합격시키고 여성 지원자 112명의 등급점수를 낮춰 불합격시켰다. 이같은 혐의로 KEB하나은행 전 인사부장과 국민은행 전 부행장 등이 구속 기소된 상태다. 함영주 KEB하나은행장은 불구속 기소됐다.

국민은행과 KEB하나은행은 일단은 모범규준을 준수하면서 향후 성비 공개에 대한 내용을 개별적으로 마련할지 검토할 방침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추후 성 차별 채용 재발 방지를 위한 장치가 향후 나올 것으로 본다”면서도 성비 공개 여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그는 “성비 공개는 전 은행 의무도 아닐 것이고 5:5로 뽑았다고 해도 애매한 부분이 있다”고 답했다. 최종 합격한 지원자들의 성비를 공개하려면 모든 전형에서 몇 명이 지원했고, 몇 명이 합격했는지까지 밝혀야 한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3만명의 지원자 중 남성과 여성의 지원자가 각각 2만명, 1만명일 경우 서류 전형을 통과시키는 성비가 5:5라면 오히려 남성 지원자에게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관계자는 “각 절차별, 전형별로 성비를 공개하고 몇 명이 올라갔는지까지 공개하라는 의견이 있었다”며 “성비를 공개해도 또 다른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채용절차 모범규준 나온 것을 준수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며 “성비 부분은 당장은 강제성을 띠지 않으니 향후 논의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개월간 금융권을 휩쓴 채용비리가 혐의자들의 기소로 일단은 마무리된듯하나, 오는 하반기 채용이 시작되고 아직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신한금융그룹 채용비리 사건 결과가 나오면 한 번 더 파장이 일 전망이다.

신한금융그룹 계열사에 대한 채용비리 사건은 서울동부지검에서 수사 중이다. 대검은 신한금융 채용비리에 대해서도 엄중히 처리할 방침을 밝혔다. 신한금융 계열사 역시 성 차별 정황이 드러난 상태다. 신한카드는 서류전형 단계부터 남녀 채용비율을 7:3으로 정하고 이후 면접전형 및 최종 선발 시에도 이 비율이 유지되도록 관리한 사실이 금감원 조사 결과 적발됐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규준이 본격적으로 적용되는 하반기 채용 때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성비를 공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또 다시 국회의원발 압력이 있을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18일 채용성차별철폐공동행동 소속 단체 회원들은 이사회가 열리는 전국은행연합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 규준’에 성비 공개를 포함시킬 것을 촉구한 바 있다.

나지현 전국여성노동조합 위원장은 은행 자체적으로 성 차별 채용을 막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과 관련, 두 가지를 요구했다. 나 위원장은 “금감원 차원에서 성비 공개를 의무화하는 등 좀 더 강력하고 강제적인 기제가 필요한 것이 첫 번째다”면서 “쉽지 않을 것으로 보지만 개별은행 차원에서라도, 특히 이번 금감원·검찰 조사 결과 성 차별 채용 정황이 드러난 은행부터라도 쇄신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밝히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채용성차별철폐공동행동 소속 한 회원이 18일 오전 서울 중구 전국은행연합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날 예정된 이사회에서 처리할 ‘은행권 채용절차 모범 규준’에 성비 공개를 포함시킬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잇따른 채용비리 사건으로 은행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쇄신안은 채용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데 집중됐다. 특히 부정한 채용청탁을 막기 위해 은행 차원에서 마련한 방지책이 눈에 띈다.

규준에 따르면 부정청탁으로 합격한 직원에 대해 은행이 해당 합격자의 채용을 취소 또는 면직할 수 있다. 이들은 이후에도 일정 기간 응시 자격이 제한된다. 또, 은행이 부정한 채용청탁 사실을 인지하거나 청탁 등 부정한 행위에 대한 의심이 있을 경우 즉시 감사부서 또는 내부통제부서에 신고하고 이를 처리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운영한다. 채용담당자, 출제위원, 면접위원 등이 부당한 채용에 관여한 경우 즉시 배제되고, 은행은 해당 인사를 징계할 수 있다.

채용비리에 따른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는 규정도 마련됐다. 모범규준은 제34조(구제대상의 범위)에서 “채용절차에서 발생한 부정행위로 인해 직접 피해를 입은 자를 파악해 구제하기 위해 적극 노력한다”고 밝혔다.

피해자에게는 피해 발생 단계 바로 다음 전형에 응시 기회를 준다. 필기전형을 통과했지만, 청탁자에 밀린 경우 바로 다음 단계인 면접전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은행은 피해자 구제를 위한 목적으로 전형 단계별로 일정 기간 합격 정원보다 많은 ‘예비 합격자’를 관리할 수 있다.

이 밖에 필기시험 도입, 채용 과정에 외부 전문가 참여, 성별·연령·출신학교·출신지 등에 따른 차별 금지, 임직원 추천제 폐지, 블라인드 채용 방식이 규정됐다. 이 규준안은 이사회 의결일인 18일부터 시행된다.

김서연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