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층 강해진 콘셉트로 컴백한 그룹 블랙핑크.

[한국스포츠경제 정진영] 10여 년 전 ‘국민 가요’로 꼽혔던 원더걸스의 ‘텔 미’에는 멤버 소희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린 채 노래하는 부분이 있다. 해당 파트의 가사는 “어머나, 다시 한 번 말해봐”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꿈꾸던 여성이 마침내 상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곤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발매돼 전국을 강타한 소녀시대의 ‘지’ 역시 ‘텔 미’와 톤이 비슷하다. 사랑에 빠진 여성은 상대에 대해 “너무 부끄러워 쳐다볼 수 없”다고 하고, 그러면서도 “수줍은 나는 몰라몰라 하며 매일 그대만 그린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같은 시류는 최근까지 이어졌다. 한ㆍ일 양국에서 대세로 군림하고 있는 그룹 트와이스는 데뷔 때부터 줄곧 좋아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자’, ‘수줍어하는 여자’의 이미지로 보여졌다. YG엔터테인먼트 대표 걸 그룹 블랙핑크의 경우 데뷔 곡 ‘붐바야’에서 스스로를 ‘배드 걸(bad girl, 나쁜 여자)’이라고 하면서도 “내 몸매는 특별해” 같은 외모적 과시에 집중하거나 “빨리 달리고 싶다”고 하면서도 “달려봐 달려봐 오빠야 람보”라며 남성 의존적인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빌런' 콘셉트로 활동한 프리스틴 V.

■ 변화하는 걸 그룹, 더 이상 상냥하지 않다

그랬던 걸 그룹들 사이에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회적으로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성 평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의존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줬던 걸 그룹들 역시 그 이미지를 바꾸고 있다.

단적인 예로 블랙핑크가 있다. 약 1년 만에 새 앨범을 내고 최근 컴백한 블랙핑크는 데뷔 시절과 비교해 한층 주도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 신보의 타이틀 곡 ‘뚜두뚜두’에서 블랙핑크는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를 가진 여성으로 자신들을 정체화하며 “흔한 남들처럼 착한 척은 못 하니까. 착각하지 마. 쉽게 웃어주는 건 날 위한 거야”라고 경고한다.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회장은 이번 컴백을 앞두고 블랙핑크에게 “춤을 너무 여성스럽게 추지 마라” “동작을 더 강하게 하라”고 주문했다.

프리스틴의 변화는 더욱 극적이다. 지난 2016년 데뷔 이후로 줄곧 밝고 경쾌한 소녀상을 보여줬던 프리스틴은 멤버 나영, 로아, 은우, 레나, 결경 등 다섯 명으로 구성된 유닛 프리스틴 V를 결성하고 이미지를 180도 전환했다. 쇼케이스에서부터 “자유분방하고 센 이미지를 보여주겠다”고 단언했던 이들은 ‘악당’을 콘셉트로 한 노래 ‘네 멋대로’에서 “단 한 번도 넌 상상한 적 없는 너를 만들게”라며 주도적인 태도를 보였다.

'달리' 활동 당시 고난이도 퍼포먼스 보여준 효린.

■ 솔로 전향 뒤 한층 더 당당해져

그룹에서 솔로로 전향한 뒤 보다 주도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씨스타로 활동당시 밝은 에너지로 사랑 받았던 효린은 소속사와 계약이 만료된 뒤 브리지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홀로서기에 나섰다. 보다 자신만의 색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난 4월 발매한 ‘달리’에서 전문 댄서들도 제대로 추기 어렵다는 고난이도 장르인 트워킹에 도전하며 한층 성숙한 면모를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맞지도 않는 옷을 억지로 입어줬던 거 알아. 다시는 입지 않아도 될 이율 지금 알려줄게”라고 당당하게 이별을 고하는 ‘달리’를 통해 이별 앞에서 상처 받고 매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했다. 효린은 ‘달리’의 작사와 작곡에 모두 참여했다.

원더걸스 멤버들 역시 솔로가 된 뒤 더 주체적인 여성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예은도 효린처럼 작사, 작곡에 참여하는 싱어송라이터 핫펠트로 활동하고 있는데, 자신이 곡을 쓰는 만큼 뮤지션으로서 예은의 정체성이 곡에 잘 녹아 있다. 자작곡들에서 예은은 “보통 몇 시쯤 자요? 혹시 처음 본 사람과 밤을 보낸 적 있나요”(‘위로가 돼요’)라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능수능란하고, 변한 상대에게 “사랑을 나누잔 말은 꽤 그럴듯해. 그 순간은 널 다 가진 것 같은데 처음부터 사랑은 없다는 얘기지”(‘시가’)라고 읊조리는 냉소적인 여성을 묘사한다. 역시 원더걸스 출신인 선미의 경우 ‘가시나’와 ‘주인공’을 통해 변심한 상대 앞에서 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는 여성을 보여줬다. ‘24시간이 모자라’와 ‘보름달’에서 사랑을 갈구하고 유혹하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최근 솔로로 데뷔한 유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빈은 신곡 ‘숙녀’에서 사랑에 빠졌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대신 “빙빙 돌리지 말고 자 확실히 말해봐요. 내가 특별히 시간을 냈잖아”라며 대화를 주도하고, “그대가 날 지나쳐 간대도 난 신경 쓰지 않는”다며 다소 무덤덤한 태도까지 보인다.

그룹 원더걸스 시절보다 한층 주도적인 여성상을 노래하고 있는 예은.

사회는 점차 변화하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의 매력은 모른 채 남성이 자신을 바라봐 주길 기다리고 의존하는 여성상은 대중에게 큰 설득력을 발휘하기 힘들게 됐다. 최근 여성들이 브래지어 등 몸을 옥죄는 속옷을 벗어 던지고 화장을 거부하는 이른바 ‘탈코르셋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의 주체성을 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회와 밀접하게 소통하는 대중문화계가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이런 현상에 대해 “최근에 여성들의 권리의식이 신장되고 사회적 활동 영역이 넓어진 데 반해 여전히 유리 천장은 유지되고 심지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들이 계속 나타나면서 여성들이 굉장히 불안해졌다”며 “그러다 보니 대중문화 속에서라도 멋지고 강하고 당당한 여성을 보고 싶어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하 평론가는 그러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 여성에 대한 편견이 계속 되는 한 강한 여성 열풍은 계속될 것”이라고 점쳤다.

사진=YG엔터테인먼트, 플레디스, 브리지, 아메바컬쳐 제공

정진영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