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유상호 최희문 김해준 등 실적 앞세워 연임 행렬...IB 비중 커지면서 시황 영향 덜 받아

[한스경제=김솔이 기자]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대표이사, 김해준 교보증권 대표이사, 나재철 대신증권 대표이사, 고원종 DB금융투자 대표이사, 최희문 메리츠종금증권 대표이사, 최현만 미래에셋대우 대표이사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한때 '파리 목숨'에 비유되던 여의도 증권사에 '장수(長壽) CEO' 타이틀을 단 이들이 늘고 있다. 과거 증권가 CEO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2~3년에 불과했지만 현재 주요 증권사에서 5년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는 CEO들만 10여명에 달한다. 

부침이 심한 증권가에서 가장 큰 연임 비결은 단연 실적이다. 증시 호황에 따라 증권사들이 호실적을 달성하면서 CEO들의 연임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지난해 초대형 투자은행(IB)의 등장 등 증권업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장기 비전을 위한 CEO들의 경험이 중요해진 점도 장수 CEO가 탄생하는 이유로 보인다. 

‘파리 목숨’ 증권가 CEO는 옛말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대표이사는 비(非) 오너 일가 CEO 중 최장수 CEO로 꼽힌다. 2007년 47세 나이로 ‘최연소 최고경영자’ 타이틀을 얻었던 그는 지난 3월 11번째 연임에 성공하며 12년째 장기 집권 중이다. 실적 호조를 이끌며 탁월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장수 CEO 반열에 올랐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해 위탁매매(BK)부문, 자산관리부문(AM), 투자은행부문(IB), 자산운용부문(Trading) 등 전 부문에서 고른 성과를 거두며 당기순이익 5244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121.5%나 증가한 것으로 업계 최고 수준이다. 더불어 유상호 대표 취임 당시 한국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2조 2000억원에 불과했지만 현재 4조 2000억원으로 늘어났다. 

유상호 대표뿐 아니라 두드러진 실적은 장수 CEO에게 필수 요소다. 오너가 CEO 인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부진한 실적을 낸 CEO가 살아남기란 쉽지 않다. CEO의 경영 성과가 오너에게 신뢰를 주고, 오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경영을 맡기는 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지난 3월 5번째 연임을 확정지은 김해준 교보증권 대표 역시 탄탄한 수익구조를 바탕으로 흑자 기조를 유지한 점이 연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교보증권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749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0.28%나 증가하는 ‘깜짝 실적’을 기록했다. 자기자본이익률(ROE)은 9.6%로 중·소형 증권회사들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나재철 대신증권 대표 또한 지난 3월 3연임에 성공하며 ‘장수족 CEO’에 입성했다. 2012년 대표에 취임한 나재철 대표는 지난해 전년 대비 63% 증가한 당기순이익 1206억원을 기록해 주목을 받았다. 대신증권이 100%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들도 모두 흑자 전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재철 대표와 같은 해 CEO가 된 최희문 메리츠종금증권 대표이사는 2014년 이후 3년 연속 두 자릿대 자기자본이익률(ROE)를 기록하는 등 ‘실적 황금기’를 연 인물이다. 지난해 메리츠종금증권의 당기순이익은 3552억원으로 전년보다 39.9% 늘었다. 

올초 금융투자협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키움증권 대표이사에 물러난 권용원 회장도 직전까지 10년 가까운 기간동안 CEO로 재직한 바 있다.

오너 일가가 직접 경영 일선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윤경립 유화증권 대표이사는 창업주 고(故) 윤장섭 명예회장의 넷째 아들로 2000년부터 회사를 이끌고 있다. 원국희 신영증권 회장은 2005년 아들 원종석 대표이사에게 경영을 맡겼다. 유진투자증권의 경우 유경선 유진그룹 회장의 동생인 유창수 대표이사가 2011년부터 경영 중이다.

오너 경영은 당장 눈앞에 경영 성과를 보여야 하는 전문 경영인 체제와 달리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영 전략을 세우는 특징이 있다. 이들 증권사 모두 선대 경영진의 경영 철학을 토대로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고 있다. 

최현만 미래에셋대우 대표이사는 1997년 창립된 그룹의 원년멤버로서 20년 이상을 경영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다. 2012년부터 4년 간 미래에셋생명 대표이사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2016년 미래에셋증권 지휘봉을 잡았다. 특히 박현주 미래에셋대우 홍콩 회장이 해외 사업에 집중하며 그룹 내 입지는 더욱 커졌다.

‘장수족’ CEO 만드는 몇 가지 요인

자본시장연구원의 ‘국내 증권업 CEO 재임기간과 경영성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 CEO들은 대체로 재임 기간이 길어질수록 뛰어난 경영성과를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석훈·조성훈 연구원은 “장기 재임 CEO들은 우수한 경영 역량을 지녔을 뿐 아니라 일관적인 경영 전략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나라 증권사들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려면 투자은행으로의 도약 등 발전 방향을 꾸준히 추진하는 장수 CEO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증시 호황 역시 증권사 CEO들의 연임 배경으로 꼽힌다. 각국 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정책에 맞물려 증권사 실적이 동반 호조를 보였다. 지난해 전체 증권사 당기순이익은 3조8322억원으로 전년(2조1338억원) 대비 79.6% 급등했다. 이는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당기순이익 4조4299억원 이후 연간 최고 실적이다.

아울러 증권사들이 브로커리지(위탁매매)에서 투자은행(IB) 부문으로 사업의 무게 중심을 옮기면서 IB 역량을 지닌 CEO들이 연임하고 있다. 시황의 영향을 예전보다 훨씬 덜 받게 된 것이다. 김해준 교보증권 대표는 대우증권에서 IB 영업부, IB사업본부장, 기업금융본부장 등을 지낸 ‘IB 전문가’로 교보증권으로 옮겨와서도 기업금융 그룹장, IB투자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유상호 대표 역시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동원증권에서 IB본부 및 법인·국제영업 본부장을 지냈다. 최희문 대표도 IB부문을 대폭 강화하며 중소형사에 머물러 있던 메리츠종금증권을 단숨에 '메이저급'으로 키워 낸 장본인이다.

연임 CEO 귀한 대기업·은행 계열 증권사

오너 체제의 증권사와 달리 대기업·은행 계열 증권사에서는 장수 CEO를 찾기가 쉽지 않다. 대기업의 경우 그룹 인사이동 과정에서 임원들의 자리 바꾸기가 자주 일어나 증권사 역시 연임하는 CEO가 드물다.

또 그룹 전체의 인사 방향에 따라 CEO의 운명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윤용암 전 삼성증권 대표이사는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전년(1742억원) 대비 55.8% 증가한 2714억원을 기록하는 등 실적 개선을 이뤘지만 삼성그룹 내 세대교체 바람으로 ‘60세 룰(60세 이상 CEO 퇴진)’에 따라 자리에서 물러났다. 

은행지주회사에 속한 증권사 CEO 자리는 전체 계열사의 인사이동과 연관돼 있다 보니 연임을 보장받기가 쉽지 않다. 이에 기존 CEO가 실적과 관계없이 물러나거나 증권업 경력을 갖춘 의외의 인물이 CEO에 선임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업계에서는 증권업 경험이 없는 CEO가 ‘낙하산’으로 내려올 때마다 현안 파악에만 몇 개월이 걸린다는 한숨섞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례적으로 2012년 현대증권 시절부터 CEO로 활동했던 윤경은 KB증권 대표이사는 2016년 KB금융그룹의 현대증권 인수 이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장수 CEO들의 첫번째 요건은 무조건 실적이다. 좋은 실적을 낸 CEO는 오너의 신뢰를 등에 업고 연임하게 되고 오너 역시 이 과정에서 CEO 교체에 따른 비용을 아낄 수 있으니 서로에게 윈윈(win-win)게임이 된다. 반면 실적이 나쁘면 물러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에 반해 미국 증권사들은 CEO 중심 지배구조로 인해 무능한 CEO도 장기 재임할 수 있는 구조다. 이석훈 연구원은 “미국 증권사 CEO들은 이사회 구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이사들의 지지를 받아 연임하는 경우가 있다”며 “반면 우리나라의 장수 CEO는 좋은 실적으로 오너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말했다. 

‘고인물’에 문제는 없나

물론 장수 CEO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CEO들은 외부에 드러나는 경영 성과에 집중하느라 내부 관리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장수CEO 회사인 한국투자증권 메리츠종금증권 등은 미흡한 직원관리로 인해 올들어 금융감독원에서 가장 많은 횟수의 제재를 받았다.

실적 부진과 회사 안팎의 잡음에도 오너의 두터운 신임으로 연임하는 장수 CEO도 있다. 고원종 DB금융투자 대표이사는 2016년 동부그룹이 대우일렉트로닉스(전 대우전자)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최근 몇년간의 실적이 들쑥날쑥 했음에도 연임에 성공했다. 이를 두고 그룹창업주이자 오너의 김준기 전 회장의 두터운 신임 덕분 아니겠냐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또 최고경영자가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다 보니 원활한 인력 수급이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문제점도 있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보통 CEO가 교체되면 임원진이 물갈이되고 이로 인해 조직 전체의 인력이동이 일어나는 계기로 작용하곤 하는데 CEO가 장수하다 보니 자연적인 퇴출 말고는 인사 요인이 없다"며 "결국 조직의 역동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고 말했다.

김솔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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