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월 부산에서 열린 ‘제11차 시국집회’에 참석한 박정기 씨./사진=연합뉴스

[한스경제=김현준 기자]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86세의 나이로 28일 오전 5시 48분께 숨을 거뒀다.

박 씨의 가족에 따르면 부산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박 씨가 사람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해진 상태였다고 알려졌다. 그는 지난해 2월 척추 골절상으로 수술을 받은 뒤 입원했다.

박 씨의 아들이자 박 열사의 형인 박종부 씨는 "오늘 새벽 4시 30분 병원 측으로부터 위독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던 중 비보를 접했다"고 말했다.

민갑룡 경찰청장과 문무일 검찰총장을 비롯한 부산고등검찰청장과 부산지방검찰청장 등 검찰 고위인사들도 이날 오후 고인의 빈소를 조문할 예정이다.

박 씨의 아들 박 열사는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1986년 4월에는 청계피복노조의 합법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다 구속되어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박 열사는 출소 후에도 학생운동을 이어가던 중 1987년 1월13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연행됐다. 당시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관련 수배자이자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인 박종운의 소재 파악을 위해 후배 박 열사를 불법으로 체포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로 연행된 박 열사는 박종운의 소재를 묻는 질문에 계속 답하지 않았고,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한 그는 결국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박 열사의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다. 그 유명한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그러나 석연치 않은 이유에 야당과 언론, 종교계 등에서 끊임없이 진실 규명을 요구했고, 부검의 증언과 후속조사 결과 박 열사의 사인이 고문치사였음이 드러났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그해 6월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해당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은 지난해 12월 개봉 후 700만이 넘는 관객 수를 동원하면서 많은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박 열사가 부당한 고문 등으로 사망한 것이 명백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검찰은 아무런 사과 조치가 없었다. 박 씨를 비롯한 박 열사의 유족은 검찰에 사죄를 계속해서 촉구해왔다.

이에 지난 2월 검찰 산하 과거사위원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인권침해와 검찰권 남용 의혹이 있는 12건에 대해 재조사에 나섰다. 지난 3월에는 문 총장이 검찰총장으로서는 처음으로 박 씨를 찾아가 정부와 검찰을 대표해 공식 사과 입장을 밝혔다.

김현준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