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무자원 산유국 꿈 이뤄…IMF 구제금융 직전엔 산소호흡기 투혼까지

[한스경제=이성노 기자]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26일 타계 20주기를 맞는다.

최종현 회장은 제1차 석유파동의 한파가 불어닥친 1973년 12월, 선경 창립자이자 가형인 최종건 회장이 급환으로 세상을 떠난 뒤 수장 자리에 앉아 1998년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칠 때 까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원대한 꿈을 치밀한 준비와 실행력으로 현실로 만들었다.   

석유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한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만들었고,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했으며 세계 최초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상용화로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정보통신기술) 강국의 기반을 닦는 등 '늘 10년을 내다본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최종현 회장은 폐암 투병 중에도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경제 살리기를 호소하는 등 나라 경제를 먼저 생각했고, '인재를 키워야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인재양성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고 최종현 회장(왼쪽)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오른쪽에서 두번째)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SK그룹 제공

◆ 직물 공장에서 무자원 산유국 그리고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SK를 작은 직물 공장에서 세계 수준의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거듭난 데에는 최종현 회장의 확신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종현 회장은 자본, 기술, 인재가 없었던 1973년 당시 선경(현 SK)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했다. 섬유회사에 불과한 SK가 원유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최종현 회장은 장기적 안목과 중동지역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 구축 등 치밀한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다. 석유를 설립해 실천으로 옮겼다. 이후 두 차례 오일쇼크를 경험하면서 자원이 곧 무기이고, 국력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최종현 회장은 1983년부터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다.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한 유전개발에 끊임없이 투자한 결과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하며 산유국 대열에 올랐다. 이후 SK는 9개국 13개 광구에서 일평균 5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4개의 LNG 프로젝트를 일구며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냈다. 1991년에는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해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 쉬지 않고 미래 준비한 최종현 회장

에너지·화학 사업 진출 이후에도 쉬지 않고 미래를 준비한 최종현 회장은 차세대 먹거리 사업으로 정보통신분야을 선택했다. 

최종현 회장은 미국 현지 이동통신사에 직접 투자를 하거나 이통사에 직원을 파견, 실제 근무를 하는 방식으로 통신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통신 경영 노하우를 축적해 나갔다. 1990년에는 미국 IT업체와 합작, 선경텔레콤을 설립하며 정보통신산업 진출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앞선 준비 끝에 1992년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당시 2위와 압도적인 격차로 사업권을 획득했지만 특혜시비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최종현 회장은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는 온다"는 신념 아래 정보통신 사업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해 이동통신사업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SK텔레콤은 아날로그 수준의 국내 기술을 넘어 1996년 CDMA 상용화 등 세계 최초 신화를 써내려갔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이동통신 환경 구축과 혁신기술 개발은 ICT 코리아로서 국가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이바지했다. 

폐암수술을 받은 고 최종현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 경제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SK그룹 제공

◆ 산소호흡기 꽂고 대통령 독대했던 재계 리더

최종현 회장은 21세기 일등국가가 되기 위한 구체적 방향으로 세계화와 시장경제 활성화를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를 제시했다. 

1980년대 세계변화의 흐름이 민족주의에서 지역주의의 시대를 거쳐  세계화(Globalization)의 시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다. 시장의 힘이 한 국가의 경제를 넘어 주변 지역과 세계를 통합시킬 것이라고 확신하고 글로벌 시장 진출과 경쟁력 강화에 나섰다. 실제 공산권 개방에 대비해 중국과 긴밀히 교류했던 최종현 회장은 한·중 수교의 민간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난 199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한 최종현 회장은 세무조사 등 불이익을 겪으면서도 금리인하, 규제철폐, 쌀 시장 개방 같은 민감한 문제에 고언을 서슴지 않았다.  

재계 리더였던 최종현 회장은 폐암 투병에도 늘 국가 경쟁력을 먼저 걱정했다.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폐암 투병 중에도 산소호흡기를 꽂고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 참석했고, 청와대를 찾아가 대통령과 독대한 일은 재계에서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독대에선 "한국경제는 비상사태를 선포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고언했다. 임종 직전까지 일등국가로의 비전을 놓지 않았던 최종현 회장의 충언이었다. 

고 최종현 회장이 1986년 해외 유학을 앞둔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SK그룹 제공

◆ 사재 털어 장학 재단 설립…"인재를 키워야 경제대국”

최종현 회장은 SK의 성장조차 불투명했던 1970년대부터 인재양성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최종현 회장은 우선 1972년에 조림사업으로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설립했다.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자원빈국에 자본주의 경험도 일천한 이 나라가 지적 역량마저 부족하면 발전이 정체될 수 있다"며 "지금은 변방의 후진국이지만 지금부터 세계적인 학자들을 키우면 30년 후에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며 장학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장학재단 설립 당시, 회사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 않자 내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하지만 최종현 회장은 '회사'가 아닌 '국가와 사회'를 위한 결단이라며 장학재단 설립을 밀어붙였다. 재원은 '사재'로 충당하겠다며 불만을 잠재웠고, 서울 퇴계로의 빌딩 한 채(5540만원 상당)를 출연금으로 내놓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500 달러인 시절, (1970년대 후반 원 달러 환율 484원 적용) 200배가 넘는 11만달러 규모의 거액이었다. 재단은 당시 서울 집 한 채 값보다 비싼 해외 유학비용은 물론 생활비까지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44년간 양성한 인재는 국내외 곳곳에서 거목으로 뿌리내렸다 약 3700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740명에 달하는 해외 명문대 박사를 배출했으며 80% 이상이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양계 최초 예일대 학장인 천명우(심리학과), 한국인 최초 하버드대 종신교수 박홍근(화학과) 등 세계적 석학이 된 이들은 학술교류와 민간외교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이 14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사옥 로비에서 개막한 최종현 SK 회장 20주기 사진전에서 무인단말기를 통해 SK가 지원하는 사회적기업에 기부를 하고 있다. /사진=SK그룹 제공

한편 SK그룹은 최종현 회장의 타계 20주기를 맞아 업적과 경영철학을 기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룹 구성원의 기부금을 모아 숲 조성 사회적기업인 트리플래닛에 전달해 5만평 규모의 숲을 조성키로 했다. 14일부터는 주요 사업장에서 고인의 업적과 그룹의 성장사를 살펴 볼 수 있는 20주기 사진전이 이어지고 있다. 24일에는 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20주기 추모식을 겸해 최종현 회장의 경영철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이성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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