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실무는 전문 경영인에 대폭 위임하고 기업 비전·국가경쟁력 확보에 주력
사재 털어 인재 육성...장학재단 설립·조림사업으로 장학기금 마련

[한스경제=이성노 기자] "21세기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 되고 SK는 세계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갈 겁니다. 지금은 변방의 후진국이지만 인재양성 100년 계획에 따라 고도의 지식산업사회를 목표로 일등 국가로 발전해야 합니다."

일생을 한국경제 성장과 함께한 고(故) 최종현 회장이 지난 1978년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과 나눈 대화 중 일부이다.

올해로 타계한 지 20년이 되는 최 회장은 이처럼 단순히 기업을 넘어 나라가 어떻게 부강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던 기업가였다. 생전의 업무 스타일도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회사에 출근했다가 몇 시간만 업무를 보고는 사무실에서 사라지곤 했다. 전문 경영인들이 알아서 하는데 자신이 세세한 일까지 개입하게 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소신에서다. 

대신 최 회장은 회사 바깥에서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기업의 비전과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전략을 마련하는데 역량을 쏟아부었다. 지금은 그룹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정유나 이동통신 같은 미래 핵심 사업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같은 노력의 산물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장으로 일하면서 정·관계 인사를 만나 고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도 평소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였다.

최 회장의 바람대로 작은 직물 공장이었던 SK그룹은 세계 수준의 에너지·화학 기업으로 거듭났다. 국내 재계 순위 3위이고, 지난 7월 미국 경제 전문지 '포춘'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사상 최고인 65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으로 세계 10대 경제 강국을 자랑할 정도로 성장했다.

고 최종현(왼쪽) 회장이 1981년 초 내한한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오른쪽에서 두번째)과 담소를 나누는 장면. 최종현 회장은 제 2차 석유파동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와 '석유외교'를 통해 우리나라의 원유공급 문제를 해결했다. /사진=SK그룹

◆ '나라 먹여 살릴 산업' 고민한 선각자

최 회장은 섬유가 주력이던 1973년에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추진하겠다는 비전을 밝혔다. 당시만 해도 주변에서는 허황된 꿈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그는 집요했다. 1973년 선경석유를 설립한 뒤 일본 이토추상사와 함께 정유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원유공급을 약속받았다. 정부로부터는 정유공장 설립 허가까지 받았으나 이후 오일쇼크가 닥쳤다.

관련 글로벌 합작사업들도 수포로 돌아갔으나 최 회장에게 포기는 없었다. 그는 장기적 안목으로 중동지역 왕실 등과 석유 네트워크를 구축해갔다. 최 회장의 진정성에 마음을 연 중동 인사들은 2차 오일쇼크 때 한국이 에너지 위기를 벗어나게 도와준 우군이 됐다. 대한석유공사(유공) 합작사인 걸프의 철수를 사전에 예상한 최 회장은 걸프 보유 지분 인수를 위해 직접 TF를 이끌었고, 결국 1980년 지분인수에 성공하며 유공의 1대 주주가 됐다. 원유 확보와 중동 오일머니 유치 측면에서 독보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이후 유공은 세계 최대의 정유공장이자 복합 석유화학 단지를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다.

이후에도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던 최종현 회장은 차세대 핵심 사업으로 정보통신을 택했다. 선진 산업동향을 분석하기 위해 이미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설립했을 때 가까운 미래에 정보통신 분야가 핵심성장 동력이 될 것임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 현지 이동통신사에 직접 투자를 하거나 이통사에 직원을 파견해 통신시장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통신 경영 노하우를 축적해 나갔다. 1990년에는 미국 IT업체와 합작, 선경텔레콤을 설립했다. 이후 1991년 특혜시비로 제2이동통신사업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으나 2년 뒤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하게 됐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이동통신 환경 구축과 혁신적인 기술 개발로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정보통신기술)코리아로서 국가 위상을 높이는데 최 선대 회장의 끊임없는 도전과 노고가 숨어있었다. 

벌거숭이였던 충주 인등산이 울창한 '인재의 숲'으로 변한 모습. 원안은 고 최종현 회장과 고 박계희 여사가 1977년 인등산에서 함께 나무를 심는 모습. /사진=SK그룹

◆ "인재만이 희망" 최 씨 '고집'이 가꾼 '인재의 숲'

최 회장은 미국 유학시절 이스라엘이 강소국이 된 배경을 궁금해했다. 그리고 자원이 부족하고 인구도 많지 않은 이스라엘이 미국 사회에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와 사회가 합심해 인적자원을 개발했고 이들이 요로에 진출하면서 국가 브랜드를 키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최 회장은 "자원빈국에 자본주의 경험도 일천한 우리나라가 지적 역량마저 부족하면 발전이 정체될 수 있다"며 "지금은 변방의 후진국이지만 지금부터 세계적인 학자들을 키우면 30년후에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며 장학사업에 뛰어 들었다. 우선 1972년에 조림사업으로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설립했고,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44년간 양성한 인재는 국내외 곳곳에서 거목으로 뿌리 내렸다. 재단 장학생의 80% 이상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동양계 최초의 예일대 학장인 천명우 교수(심리학과), 한국인 최초의 하버드대 종신교수인 박홍근 교수(화학과), 한국인 첫 블룸버그 석좌교수인 하택집 존스홉킨스대 교수(물리학과), 미국의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 100인(2009년)에 오른 박지웅 시카고대 교수(화학과) 등이 거목으로 자리 잡았다. 이 밖에도 이창용 IMF 아시아태평양 국장 등 재단이 키운 인재들이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십년수목 백년수인(十年樹木 百年樹人·10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고, 100년을 내다보며 사람을 심는다)' 인재양성을 위한 최 씨 '고집'은 오일쇼크, 외환위기 등 수 많은 위기에도 흔들림 없이 대(代)를 이어 진화·발전하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은 1998년 재단 이사장직에 오른 뒤, 인재양성의 분야와 대상을 글로벌로 확장시켰다. 선대가 한국의 발전을 위해 국내 인재 양성에 집중했다면 아들은 범(凡) 국가적인 발전을 위해 해외 인재육성에 매달린 것이다.

재단은 학술연구 만이 아니라 동북아가 직면한 정치외교 문제를 고민하는 학술포럼과 문화간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교류모임도 개최하고 있다. 2000년부터는 아시아 각국의 학자 800여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연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 국가의 학문 발전을 위해 현지로 직접 다가가는 학술교류 활동도 벌이고 있다. 이 밖에도 베이징포럼, 상하이포럼, 하노이포럼 등을 개최해 글로벌 현안을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집단지성의 플랫폼'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성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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