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 문주용 기자] 사우디 아라비아의 광활한 사막은 누구도 불모지라 하지 않는다. 신의 선물을, 그것도 엄청난 규모의 선물을 받아 모든 나라부터 부러움과 시샘을 사고 있다. 왕조는 세계 최대의 갑부 상위 반열에 올라있다. 엄청난 부를 가진 나라는 도덕적으로 자신감과 여유를 가질 법 한데, 사우디 왕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놀래키기 일쑤다. 신이 내린 선물은 석유 뿐 아니라 보복과 살인 등 비열함까지 담은 `판도라의 상자` 였을까.   

왜 부자나라 사우디아라비아 왕조는 이렇게까지 비열하고, 무자비하고 무법적일까. 국제사회의 비난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외국 땅에서(터키 사우디 총영사관은 자국 주권이 미치는 곳이지만) 반체제 언론인을 살해하는 야만을 저질러 놓고도 자성의 목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다. 사건의 배후에 무하마드 빈 살람 왕세자라는 차기 국왕 후보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더욱 놀랍다. 이 왕조는 어떻게 탄생했고, 무엇을 추구하기에 무자비한 살인을 함부로 저지르는 것일까.

사우디 아라비아는 개혁 개방을 모르는 또다른 지구촌 독재국인가. 개혁가 이미지였던 살림 왕세자가 체제 유지에 급급한 일개 독재자에 불과한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사우디 왕조의 만행, 서방국들의 반발 등이 단순한 국제적 갈등으로만 보이지 않는 더 큰 이유는 사우디가 세계 최대산유국으로 국제 유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 때문이다. 석유를 믿고 만행을 저지르는 `불량국가` 인가.

◇사우디 왕조, 개혁을 할 수 있는 왕조인가

1932년 지구상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출범한다. 100년도 안된 신생국이지만, 국제적 영향력은 수천년 역사를 지닌 나라보다 더 위협적이라는 평가다. 실제 그 평가는 정확한 것인가.

압둘 아지즈(이븐 사우드 국왕)은 베두인족의 부족장이자 군주에 불과했다. 본인도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향해 이념이 같은 이크완 비밀결사조직과 손을 잡았다, 이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주변 부족을 통합한 후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웠다. 하지만 이 나라는 현재 전세계적으로도 매우 특이한 나라다. R. 매기의 말처럼 “왕과 국민 사이에는 어떠한 인간도, 이떠한 제도도 허락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비개인적인 관료조직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세습국이면서 절대왕조국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면서 국가재산은 모두 왕조재산이다. 석유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모두 왕조 수익이다.

터키 경찰이 지난 16일(현지시간)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총영사관에서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실종사건과 관련해 수사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사우디에는 민주정치의 기본이라 할 삼권분립도, 헌법도 없다. 샤이크(베두인족의 족장)중의 샤이크이며 사형 등 법적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이맘(이슬람교도의 우두머리)라는 사법 및 종교 최고지도자다. 의회라는 회의체에서 그는 최고조정자다. 왕가의 왕족위원회나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모임인 울레마 위원회, 내각의 각료회의 등이 있지만 형식적이다. 국왕에게 제출하는 어떤 의견도 권고일 뿐 일절 구속력이 없다. 세계 1,2위 석유매장량을 갖고 있고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이지만, 그 돈은 전부 사우디 왕조로 귀속된다. 그러니 국왕이든, 왕세자든 세계 최고 부호일 수 밖에 없다.

이 지위는 최고군통수권자, 사법 입법 행정 최고 책임자이며, 최고종교지도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최고 부자다.

왕위 승계는 분명한 원칙 하나만 존재한다. 이븐 사우드의 자손들로 이뤄진 왕실 내부가 국왕을 결정한다. 코란에 따라 그 자리를 수행할 정신적 자질이 있는지를 따질 뿐이다.

◇ 사우디 왕조도 암살 대상이었다

절대 왕조체제라 안정적일 것같지만 절대권력을 노리는 경쟁자들은 너무 많다. 그래서 왕족사이에 암투와 살인, 퇴위가 종종 일어난다. 절대 권력을 차지하려는 갈등이지만, 외부로 비쳐지기는 정치적이며 또다른 면에서는 종교적 갈등 요인도 깔려있다.

왕조 내부의 갈등은 종교와 부(富)중에 무엇을 더 중시할까 하는 문제로 단순화할 수 있다.

왕조의 종교적 철학은 와하비즘(이슬람 정통교리로 복귀하자는 주장)으로 대표된다. 반대로 왕조를 개혁하고 국민 복지를 강화하자는 개혁세력, 특히 개혁왕족과 기술관료가 대척점이 선다. 개혁세력이 완고한 집권세력에 불복하거나, 집권세력이 개혁세력을 제거하는 식이다. 외부적으로는 이집트, 이란 등 주변 국가들의 시민혁명이 사우디왕조내부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기도 했다.

유리에 비친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전경./사진=연합뉴스

사우디의 전성기를 개막했다는 파이살 국왕의 암살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그는 초대 국왕인 이븐 사우드의 아들로 형을 퇴위시키고 즉위했다. 오일달러가 모이기 시작하자 국가 개조 또는 개혁을 신중히 실천했다. 1966년 사우디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전 방송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보다 6년 전에는 베네수엘라와 함께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창립시키며 세계최대 석유산유국의 지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OPEC의 위세까지 등에 업고 서방국가에 가장 무시무시한 아랍국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1975년 조카의 손에 운명한다. 그의 개혁정책에 반발한 왕조 일원이 그를 암살한 것. 

사소한 전복 시도는 이전에도 적지 않았다. 압둘라 타라키 초대 석유관리청 청장 사건이 있었다. 지난 1957년 설립된 석유 및 지하자원 관리청을 맡은 타라키는 아랍 민족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미국을 제국주의라며 왕조의 적으로 간주하던 인물. 줄곧 미국 석유재벌들을 비난했고 친서방적인 아람코(아라비아-아메리카 석유회사)의 운영에 강한 불만을 표해왔다.

석유정책에 전문성이 있고 열정도 강했지만, 그의 적대감은 오일달러를 벌어들이려는 사우디 왕조를 불편하게 했다. 사우디 국왕은 그를 ‘자유로운 왕자들`이라는 사우디내 모반세력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하루 아침에 쫓아냈다. 파이살 당시 왕세제는 1962~64년 사이 타라키와 `자유로운 왕자들` 단체를 이끌던 타랄 왕자, 그리고 당시 국왕이던 사우드 왕을 잇따라 이집트로 추방했다.

텔레비전 방송의 허용에 강한 불만을 품은 파이살 국왕의 조카인 할리드 이븐 무사이드도 모반을 꾀하며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어 복수심에 불탄 그의 동생인 파이살 이븐 무사이드는 1975년 쿠웨이트의 새 석유자원부 장관이 리야드를 방문했을 때, 장관 수행원의 비호를 받아 파이살의 가슴에 권총 세발을 쏜다. 국왕은 사망했고, 이 자리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천재이자 왕국 첫 번째 민간 변호사 출신인 자키 야마니 석유장관도 표적이었지만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파이살에 이어 할리드 이븐 아브드 알 아지즈 앗 사우드(할리드)가 국왕으로 오르고, 그의 동생 파드가 왕세제 자리를 차지했다. 실권자는 파드. 할리드 왕이 자연사한 1982년 마침내 파드국왕 시대가 열린다. 

파드의 즉위 직후에 국제사회를 경악케 하는 인질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해 12월21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석유수출국장관회의에서 베네수엘라의 전설적인 테러리스트 `카를로스`(본명은 일렉 라미레스 산체스)가 악명을 날린다. 그는 독일 적군파, 리비아의 카다피 추종자들과 합세해 석유장관들을 인질로 잡는 사건을 일으킨다. 

파드 국왕 재위기간 사우디아라비아는 국제사회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는 지금까지 최고의 전성기로 불린다. 파드는 23년을 재위한 뒤 2005년 사망했다. 건국이래 가장 강력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는데 성공한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압둘라 국왕이 즉위해 10년간 통치하고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왕세제였던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곧바로 즉위해 지금까지 재임하고 있다. 그는 막내 동생, 조카 등 1순위 왕위계승자를 쫓아낸 뒤 지난 2017년 30대 초반의 자신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임명한다.

살만 국왕과 빈 살만 왕세자는 정권을 장악한 후 개혁 정책들을 내놨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성들의 자동차운전을 허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이 과연 국민들의 복지를 제고하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들은 주변 왕조들의 입헌군주적 개혁이나 시민혁명에 놀라 개혁의 빗장을 살짝 열어보인 정도가 아닐까. 

파드 국왕에 대한 평가도 달리 볼 수 있다. OPEC을 주도하며 국제유가를 끌어올리는 등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공로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달러화 금본위제를 폐기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곧바로 이어진 달러화 평가절하로 오일달러의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국제유가를 올려놓고도 실제 이득은 크지 않았다. 미국의 희생양 노릇에 불과했던 것. 

와하비즘은 코란과 관습법인 `수나`에 따라 불가피한 이유가 없는 한 어떠한 개혁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점등을 고려할 때 사우디 왕조의 개혁은 진정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문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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