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평화무드가 급속도로 개선되고 있다. 남북한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리면서 평화통일에 대한 인식도 여느때보다 긍정 시그널로 바뀌고 있다. 중국을 거쳐 동남아 정글지대를 통과하며 탈북 3년여만 남한의 땅을 밟은 한 탈북인의 이야기를 게재한다. 필자인 최영일씨는 지난 2006년 입국해 현재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에 있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 탈북당시 북에 두고 왔던 약혼녀까지 모두 남한으로 인도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는 북한에서 조부모님이 기독교인 이라는 이유로 하층민에 속해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속한 계층이 바로 북한에 살고 있는 대부분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얘기도 했다. 최영일씨의 한편의 탈북 수기이기도 한 <개마에서 한라까지>연재를 통해 그의 탈북 과정과 30여년을 지냈던 북한에서의 생활을 생생하게 전하려 한다. 개마고원은 그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다. <편집자주>   

파도가 거셌다. 남북관계의 파도, 북미관계의 파도가 거셌던 2018년 한해도 저물어 간다. 먼저 2018년을 돌아보기 전에 2017년 북한의 신년사를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 2017년 북한의 신년사의 핵심은 자력자강에 기초한 핵무장 국가의 완성이었다. 북한은 첫 수소탄 시험과 핵탄두 폭발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대륙 간 탄도 미사일 시험발사준비사업이 마감단계라고 강조하고 나선다. 
이것은 미국에 보내는 신호인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도발 때 마다 인내하고 있었지만 ICBM에 대해서는 미국과의 마지막 선을 넘는 게임체인저의 신호로 간주하고 있었다. 자국본토에 로켓이 날아온다는 것은 자연히 미국으로서도 초강경대응으로 나설 수밖에 없게 한다. 한편 남한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북한은 7.4공동성명 발표45돌이 되는 것과 10.4선언 발표 10주년을 강조하면서 민족이 힘을 합쳐 자주통일의 길로 나갈 것을 강조한다.
그 이전 시기 남북관계는 남한이 유사시 북한 지도부를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할 특임여단까지 창설할 정도의 전쟁공포상태였다. 이랬던 북한이 2018년 벽두부터 달라진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이 보인 유화적 입장은 올 한해 남북한과 북미 사이에 있어보지 못한 놀라운 일들을 만들어 냈다. 남측의 대북특사가 북한으로 파견되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냈고 북한은 조건부 비핵화의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낸다. 
4.27일과 5.26일 두 번에 거쳐 남북한 수뇌상봉이 있었고 대북특사의 미국파견은 북한의 초청에 따른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 낸다. 지난 초 가을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2000년과 2007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방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6.12일 싱가포르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백년숙적 미국과 마주 앉는다. 

현시점에서 바라본 개인적 현실주의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남북교류라는 미명하에 남측은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북한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그들의 체제안전에 대한 조급함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보여진다. 비핵화 평화체제의 안정적 조건을 정비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 많은 않겠지만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란 이번에는 확실히 다른 것 같다. 1990년대 북한의 전략과 속임수를 모두 만나본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무조건 두 손 들고 공손히 핵무장을 포기하고 개발된 핵과 잠재적 핵능력 모두를 미국이 보는 앞에 전시할 것을 주장한다. 북한은 두손들고 투항하는 듯한 모습만을 강요하는 미국에 화가난 듯한 모양이다. 어쨌든 남한으로서는 미국의 선의를 기대하기보다 미국의 견제를 돌파하고 북미관계를 추진하고 그 선순환의 연장선에서 남북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갈림길에 있다. 
다음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미국을 방문해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만난다는 뉴스자막이 조금 전에 TV에 언뜻 비친다. 아마 연내에 추진하려고 했던 여러 가지 대북사업에 대해 미국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 같다. 연말 김정은의 서울방문이 예정되어 있지만 평양의 내부도 그것이 어떤 실익을 가져올 지를 따지느라 바쁠 것 같다. 남북한 모두의 앞길에 미국이 진을 치고 있다. 그것을 넘을 힘이 우리에게는 없다. 북한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아직 강소국도 아니며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는 통합된 국가적 역량도 보유하지 못했다. 갈 길이 멀다.

나의 이야기

나는 1971년 북한의 개마고원에 위치한 양강도 김정숙군(옛신파군)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부모님을 따라 함경북도 온성군에 위치한 풍인노동자구에 위치한 탄광마을에서 자랐다. 고향인 양강도 김정숙군(옛 신파군)은 남한에서는 흔히 개마고원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겨울이 길고, 봄?여름이 상대적으로 짧은 지역이다. 기후 때문인 것도 있지만 부족한 영농법으로 벼농사가 안되고 주로 감자농사를 중심으로 밀과 보리재배를 하는 지역이다.

필자의 고향은 양강도 김정숙군(옛 신파군)이다. 남한에서는 흔히 개마고원이라고 부른다. 고향 개마고원 전경. 사진제공=최영일.

해방 전 양가 조부모님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을 통틀어 노동당원이 한명도 없었다. 평안북도 선천이 고향인 아버지는 4남매의 독자로 태어나 훗날 양강도 신파군으로 추방됐다. 어머니는 중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따라 조국 평양으로 들어와 사시다가 양강도 신파군으로 추방됐다. 아버지는 어린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집안의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매우 강인한 성품을 지닌 사람으로 누이들과 함께 성장했다. 우리 가족은 북한에서 특수계층이 아닌 평범한 하위계층으로 살았었다.

인민이 평등하다고 하는 북한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신분제가 존재한다. 물론 밖으로 드러내놓지는 않지만 북한인이라면 다 알고 인정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김일성은 노동당내 연안파와 소련파와의 노선투쟁에서 그들을 모두 숙청했으며, 이후 갑산파와 만주파 가운데서 자기와 충돌하였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 일인 독재를 실시하게 된다. 이후 북한은 주민들을 크게 핵심층과 중간계층, 일반계층 3부분으로 나누고, 구체적으로 50여개에 달하는 신분계층으로 구분해 통치한다. 이것은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1960년대 중반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된 김정일에 의해 완성된다. 북한에서 기독교집안은 일반계층으로 하층민에 속한다. 기독교인을 비롯해 전쟁포로, 남한출신, 6.25당시 한국군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 가족가운데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 연안파출신의 가족들, 갑산파와 연계된 사람들 등 소위 하층신분계층은 20여개로 세분화돼 있다. 필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곧 대부분 북한사람들의 삶과 비슷한 면이 많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남북한이 하나가 되는 길에 작은 주춧돌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다음회에 계속>

 

 

최영일 동국대 북한학과 박사과정 (2006년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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