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호 한국투자증권 부회장 내정자. /사진=한국투자증권

[한스경제=김솔이 기자] 증권가 최장수 최고경영자(CEO)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이 경영 최일선에서 물러난다. 이에 따라 유 사장의 뒤를 잇는 ‘장수족(族)’ CEO들의 연임 여부가 주목받고 있다. 무엇보다 실적이 이들의 운명을 가를 가능성이 높지만 시장 변화에 따라 증권사들이 변화를 모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유상호 사장, 12년간의 CEO 여정 끝낸다

한국투자금융지주는 지난 23일 계열사별 이사회에서 유 사장을 한국투자증권 부회장으로 승진했다고 밝혔다. 부회장 승진이지만 대표이사직을 내놓으면서 경영 일선에서는 한 걸음 물러난다. 그의 자리는 ‘IB전문가’로 통하는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부사장이 맡게 됐다. 

유 사장이 CEO 자리에서 내려오는 건 2007년 47세로 업계 ‘최연소 CEO’가 된 지 12년 만이다. 한때 ‘파리 목숨’에 비유되던 증권사 CEO들 사이에서 그의 11연임은 눈에 띄는 행보였다.

유 사장의 가장 큰 연임 비결은 단연 실적이 꼽힌다. 지난해까지 한국투자증권은 11년 연속 흑자를 낸 데다 매년 업계 최고 수준의 순이익과 자기자본이익률(ROE)을 기록해왔다. 올 3분기 누적 순이익 역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1% 증가한 4109억원으로 증시 부진 속에서도 유 사장의 경영 능력을 입증했다. 특히 2007년 당시 2조2000억원에 불과했던 한국투자증권의 자기자본은 현재 4조5000억원 수준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증권가에서는 유 사장의 연임 가능성을 높이 쳐왔다. 한국투자증권은 실적 호조 외에도 초대형 투자은행(IB) 지정과 동시에 단기금융업(발행어음 업무) 인가를 받는 등 업계에서 돋보이는 성과를 냈다. 유 사장에 대한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부회장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도 알려졌다. 유 사장을 대체할 만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추측이 나왔을 정도다. 그러나 유 사장이 예상과 달리 대표이사 직함을 떼고 실질적으로 현업을 떠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인사는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변화의 과정이라는 게 한국투자증권의 설명이다. 회사 관계자는 “역대 최고의 실적을 올린 올해가 변화를 모색할 적기라고 판단했다”며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짜인 지주와 각 계열사의 조직력과 시너지가 더욱 확장해가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 사장 또한 이날 인사 발표 이후 “증권업계 사상 역대 최고 실적이 기대되는 지금이야 말로 웃으면서 정상에서 내려와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줄 시기”라며 “이전의 일상적인 업무는 내려놓겠지만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역할로 회사와 자본시장의 더 큰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 실적 악화에 마음 놓지 못하는 ‘장수족’ CEO

유 사장을 이어 가장 빨리 연임의 기로에 놓이는 비(非)오너가 ‘장수족’ CEO는 윤경은 KB증권 대표이사 사장이다. 윤 사장을 비롯해 함께 각자대표 체제를 꾸린 전병조 KB증권 대표이사 사장은 다음달 31일 임기가 만료된다.

2012년 현대증권 시절부터 CEO로 활동했던 윤 사장은 이례적으로 2016년 KB금융그룹의 현대증권 인수 이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윤 사장과 전 사장의 각자대표 체제가 지속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반응이 있었지만 이들은 2년째 KB증권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오고 있다.

윤경은·전병조 KB증권 사장(왼쪽부터) /사진=KB증권

하지만 실적을 비롯해 아쉬운 경영 성과가 두 사장의 연임에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있다. KB증권의 올 3분기 누적 순이익은 2198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66.5% 늘어나며 두드러진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미래에셋대우, NH투자증권, 삼성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자기자본 4조원 이상 증권사와 비교하면 가장 낮은 수준이다. 또 올해 KB증권의 숙원 사업이었던 단기금융업 인가가 사실상 물 건너간 점도 이들의 연임을 불투명하게 하는 요소다.

최현만 미래에셋대우 대표이사 수석부회장과 조웅기 미래에셋대우 대표이사 사장은 내년 3월 임기가 만료된다. 조 사장은 지난 16일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연임이 유력해졌다. 최 부회장 역시 그룹의 원년멤버로서 연임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최 부회장과 조 사장 또한 실적으로만 보면 웃을 수만은 없다. 미래에셋대우는 올 3분기 누적 순이익이 지난해 동기 대비 6.4% 늘어난 4343억원을 기록, 업계 1위 자리를 지켰다. 그럼에도 연말까지 지난 2월 박현주 미래에셋대우홍콩 회장이 공언했던 ‘세전이익 1조원’ 목표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상반기만해도 순이익 3578억원, 세전순이익을 4355억원 거두며 목표치에 다가가는 듯 했으나 하반기 들어 증시 부진에 따른 거래대금 감소로 타격을 입은 탓이다. 또 대형 딜 공백기 등으로 IB부문이 부진했던 데다 파생상품 발행·상환 규모까지 축소됐다.

반면 최희문 메리츠종금증권 대표이사는 양호한 실적을 바탕으로 연임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최 대표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메리츠종금증권의 경우 3분기 누적 순이익이 3196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18.9% 증가했다. 주요 증권사 중 미래에셋대우,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다음으로 높은 수준이다. 업계에서는 메리츠종금증권이 머지않아 자기자본을 4조원까지 확대해 초대형 IB로 발돋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최현만 미래에셋대우 수석부회장, 조웅기 미래에셋대우 사장, 최희문 메리츠종금증권 대표이사(왼쪽부터). /사진=각 사

‘장수족’ CEO들이 늘어나기 전 증권업계에서는 실적 부진으로 임기를 끝마치지 못한 채 퇴진하는 CEO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를 고려하면 여전히 CEO의 연임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는 실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유 사장처럼 증권사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한 발 물러나는 걸 택할 수도 있다. 특히 글로벌 증시 침체가 계속되면서 증권업계의 실적 전망 역시 어두워지고 있다. 해외 진출, 사업 다각화 등 새로운 수익원을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증시 호황에 힘입어 여의도를 굳건히 지키던 ‘장수족’ CEO들 사이에서도 지각 변동이 일어날 수 있는 셈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증시 한파 속에서 증권사들의 3분기 실적은 IB부문, 자기자본투자(PI) 부문 등의 성과가 결정했다”며 “증권사들이 전통적 기반인 리테일 업무보다 새로운 사업 진출·확장에 집중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업계 관계자는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증권사 내에서는 증시 부진의 여파를 더 심하게 체감하고 있다”며 “특히 실적 악화를 만회하던 IB부문의 성장세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없어 증권사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김솔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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