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양지원 기자] 한국영화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관행이 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나오는 오프닝 크레디트에는 영화를 만든 창작자보다 투자배급사 대표와 투자자 이름이 먼저 나온다. 2000년대 초부터 대기업의 자본이 영화에 투입되면서 시작된 관행이 쭉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영화계에는 창작자 위에 선 자본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 투자자 이름 먼저..한국에만 있는 관행

한국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영화의 시작과 띄운 검은 화면에 등장하는 낯선 이름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해당 영화에 돈을 투자한 투자배급사 대표와 투자자의 이름이다. 한국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관행이다.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는 ‘한국영화 크레디트 전수조사 결과 분석 및 한국영화 크레디트 개선에 관한 연구’를 통해 최근 3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22편, 미국 22편, 멕시코 5편, 프랑스 5편, 일본영화 5편 개봉작의 크레디트를 분석했다. 투자배급사 대표와 직원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외국 영화에는 투자배급사 관계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또 조사대사 22편 중 14편의 영화는 투자배급사 이름과 투자배급사 관계자가 오프닝과 엔드에 반복적으로 두 차례 표시되고 있다. 반면 영화를 만든 제작사의 경우 오프닝에 표시되는 로고 그래픽을 제외하고, 제작사의 이름이 크레디트 등재 3순위 이내에 소개되는 영화는 22편 중 6편에 불과했다.

■ 크레디트 개선, 어떻게 해야 하나

'군함도' 오프닝 크레디트/CJ엔터테인먼트 제공

물론 한국영화에도 변화의 움직임은 있었다. 류승완 감독은 지난다2017년 개봉한 영화 ‘군함도’를 통해 창작자보다 투자자를 중시하는 관행을 고쳐보겠다며 공동 투자사들을 오프닝 크레디트에 넣지 않고 엔딩 크레디트에만 이름을 올리게 했다.

그러나 ‘군함도’ 이후 창작자가 우선인 영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반면 미국영화는 철저히 창작자 중심으로 등재됐다. 대체로 배우, 캐스팅 감독, 음악 감독, 의상 디자이너, 협력 프로듀서, 촬영 감독, 작가, 감독 등의 순서로 기재됐다.

창작자는 크레디트에서 뒷전인 반면 투자 배급사 직원이나 배우 관계자의 등재는 점점 늘고 있는 추세라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01∼2017년 개봉한 한국영화 2543편의 크레디트 전수 조사 결과 영화인이 아닌 다른 분야 전문가와 투자배급사 직원, 배우 관계자의 등재가 늘었다. 투자배급사와 배우 관계자의 합은 ‘전문가 직군’의 73%를 기록했다.

영진위는 2018년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총 327명의 영화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크레디트 개선안 도출을 위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응답자 중 39.4%인 129명은 제작 직군, 35.5%인 116명은 연출 직군에 속했다. 또 시나리오, 홍보 마케팅, 촬영 등의 직군에서 각 10명 이상 참여했다.

크레디트 만족에 대한 문항에 응답자의 41.9%인 137명은 ‘보통이다’라고 답했다. ‘불만족이다’라는 의견은 31.2%였고, ‘만족한다’는 5.8%에 불과했다.

불만족한다고 답한 102명 중 38.2%는 그 이유를 ‘투자배급사, 배우 관계자들의 크레디트가 너무 많아서’를 꼽았다. 34.3%는 ‘크레디트 등재 순서가 불합리하므로’라고 답했다.

크레디트는 영화에서 스태프의 경력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최초의 시간이나 마찬가지다. 해당 작품의 영향력과 참여도를 입증하기 때문이다. 톱배우들이 멀티 캐스팅 영화에서 자신의 이름을 앞줄에 올리려고 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영화인들은 창작자 위에 선 자본의 행태를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한 연출부 관계자는 “자본의 흐름에 편승하는 구조가 전적으로 바뀌어야 한국영화의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영화에 참여한 이들의 직군이 혼재된 점 역시 고쳐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진위 역시 “투자배급사 직원의 크레디트 남용은 잘못된 관행의 결과물”이라며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업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군함도' 포스터 

양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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