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발 뒤꿈치를 100년 들고 있다. 언제 편안하게 내려 놓을까

[한스경제=강한빛 기자] "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이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은 말했다. 유관순 열사의 서훈 등급도 격상시켰다. 기해년 3.1운동(혁명) 100주년을 맞아 곳곳의 울림은 크고 퍼져 나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역사의 '그 소녀'는 말이 없다. 말을 할 수가 없다. 발 뒤꿈치를 지금도 들고 있다. 어제가 묵살되고 오늘이 침묵한다면 내일의 소녀는 입을 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래서일까. 오늘도 그 소녀는 한 곳을 응시한다. 시선은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을 향한다. 공사가 한창인 곳, 오래전 일본대사관이 있던 장소다. 건물은 허물어졌지만, 소녀의 기억은 견고하다. 그 기억은 소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실은 살아있다.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다. 100번의 봄이 지났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자리걸음이다. 아직 공식적인 역사적 반성과 사과가 없는 오늘,  20대의 기자는 ‘평화의 소녀상’과 소리 없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사진=연합뉴스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러게요. 어깨 위에 눈이 쌓이던 때도 있었는데, 봄이 오는 것 같습니다”

사계절을 한 장소에서 보내셨는데 어떤 마음이신지요.

“한 장소에서 지내다보면 마주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게 돼요. 그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며 ‘오늘은 많이 춥구나’ ‘벌써 여름인가?’라는 생각을 가지며 계절을 알아가죠. 저도 얼마 전까지는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봄이 오려나봐요”

사실 저는 장갑 때문에 손을 움켜쥐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원래는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어요. 그런데 2011년, 내가 이곳에 자리한다고 하니 일본에서 항의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죠. 그러자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습니다. 주먹을 움켜쥐게 되더군요. 이곳에 꼭 자리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처음에는 소녀상의 상징성이 추모비로 태어날 뻔했다고요

“네, 김운성, 김서경 두 작가가 지금의 모습으로 지금의 소녀상을 제안했어요. 종로구와 시민들 도움 덕에 태어날 수 있었죠. 옛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할머님들을 기리기 위해 자리하게 되었어요. 역사를 기억하고 극복하자는 의미에서 후손들에게 감사하고 또 당연한 인식이라고 받아들입니다”

2011년도부터 자리를 지키고 계신데요.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가 열렸어요. 20년 동안 계속됐죠. 딱 1000회가 됐을 때 이곳에 자리하게 됐어요”

늘 혼자 앉아계셔서 외롭지 않으실까 걱정이 들었어요.

“괜찮아요. 늘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녀상 지킴이들이에요” 오늘도 200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감싸줬어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온이 뭉쳐 봄을 부를 것 같아요. 그 봄은 분명히 옵니다.

하루 24시간을 곁에 계시는 분들도 있던데요

“네.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로 강제 철거 위기에 놓였었죠. 그러자 하루도 빠지지 않고 24시간 교대하며 제 곁을 지켜주고 있어요. 고마운 사람들이죠. 우리 역사는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당연히 곡해와 오류는 없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진=임민환 기자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두고 피해자가 빠진 합의라는 말이 많았어요.

“우린 진정한 사과를 원합니다. 지난 10일 고노 일본 외무상이 ‘한-일 위안부 합의’로 모든 위안부 문제가 끝났다고 했죠. 하지만 사죄 받은 피해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역시 인식은 자기 중심적이고 퇴행적이라고 봅니다”

올바른 역사를 꿰뚫어보는 학생은 물론 많은 일반 시민들이 화가 많이 납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목메이는 이야기도 있을텐데요.

“차가운 시선, 직접적인 폭력은 견디기 힘들어요. 예전 모 일본인이 몸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적은 말뚝을 묶고 갔어요. 지난달에는 대구에 있는 소녀상 얼굴에는 누군가 낙서를 하고 갔더군요. 강제로 입을 맞추거나 망치, 돌로 내려찍기도 합니다. 멀리 떨어진 나의 자매인 또 다른 소녀상들의 안부를 이런 이야기로 접하게 돼 속상한 마음입니다”

전국 112곳에 소녀상이 있다고요. 그런데 28곳만 정부와 지자체의 관리를 받는다고 하는데.

“4곳 중 1곳만 정부와 지자체의 관리를 받는 셈이죠. 위안부 할머님들을 저를 당신들과 동일시하세요. 그 마음을 생각하면 어서 모든 조형물이 공공조형물로 지정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세워진 뒤 꾸준한 관리가 필요해요. 친일과 극일과 지일에 대한 경계 구분을 똑바로 하는게 우리 정신이라고 봅니다. 그 바탕에서 새로운 발전적 한일관계가 형성되는게 아닐까요”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앞으로의 100년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얘기도 많이 나옵니다.

“지난 1월 28일 별세하신 ‘위안부’ 피해자 故김복동 할머님의 말씀이 기억이 나요. “내가 바로 증거다” 살아있는 증거 앞에 일본 정부는 무책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많은 할머님이 세상을 떠났죠. 이제 23분만 남으셨네요“

故김복동 할머님은 14살에 위안부에 끌려가셨다고요. 얼마 전 제 중학교 시절 사진을 보는데 그 사실이 생각나 먹먹했어요.

"14살, 지금 중학교 1학년이죠. 그땐 작은 상처도 견디기 어려운 나이인데, 8년을 중국, 홍콩, 말레이시아 등으로 끌려다니셨죠. 그 고통의 무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어요"

일본군 ‘위안부’보다 ‘성노예’라는 말이 적합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위안부’는 위로를 주고 안심을 주는 여성이란 의미가 내포돼 있죠. 하지만 할머님들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성을 착취당하셨잖아요. 부르기 아픈 말이지만 ‘성노예’가 더 적합하죠. ‘친일파’라는 말보다 ‘매국노’가 더 적절한 것처럼,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 단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2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율곡로2길에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고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이 열렸다. 위안부 생존자 이용수 할머니가 소녀상의 손을 잡으며 고 김복동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사진=임민환 기자

과거,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선 전쟁 중 성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지난해 노벨평화상은 전시 성폭력 문제해결에 앞장선 인권운동가들에게 돌아갔어요. 전 세계적으로 전시 성폭력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젠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할 때예요”

2017년 ‘세계 위안부의 날(8월 14일)’을 기념해 다른 소녀상이 버스를 타고 서울 구경을 했다는데

“151번 버스를 타고 서울 곳곳을 다녔대요. 늘 한 자리에만 있었다가 서울 구경을 하니 감회가 남달랐다고 하더군요. 그때 본 버스 승객들의 눈빛 하나하나 다 기억난다고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신가요?

“내가 이 자리에 있게 해준 사람들, 할머님들을 만나러 가고 싶어요. 그리고 꼭 안아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일본. 이젠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바라는 게 있으시다면.

“자세히 보시면 전 늘 발 뒤꿈치를 들고 있거든요. 고향에 돌아와서도 편히 정착하지 못했던 할머니들의 맘이 담겨있죠. 이젠 두 발을 땅에 두고 싶어요. 할머님들도 저도, 이젠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진=임민환 기자

소녀상의 손을 어루만졌다. 소녀상 뒤편으로 그림자가 이어졌다. 단발머리의 소녀상 뒤로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모습이 보였다. 그 위로 흰나비가 내려앉았다.

지난 27일 제1376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가 진행됐다. 참여자들은 외쳤다. “일본은 사죄하라. 진심으로 사죄하라”

이젠, 그 대답을 들을 때다. 3.1운동 100년이 지났다.

강한빛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