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전사들은 1994 미국월드컵에서 볼리비아와 '103분 혈투'를 치러 0-0으로 비겼다. 당시 주축 선수로 뛰었던 홍명보(왼쪽)와 지휘봉을 잡았던 김호 감독. /대한축구협회 제공

[한국스포츠경제=심재희 기자] 벤투호가 22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만날 평가전 상대 볼리비아는 태극전사들과 남다른 인연을 가진 팀이다. 한국이 2002 한일 월드컵 전까지 그렇게도 바라고 바랐던 '월드컵 본선 1승'의 제물이 될 뻔했던 상대가 바로 '남미의 복병' 볼리비아다. 어느새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사반세기 전 미국에서 펼쳐진 월드컵에서 태극전사들은 볼리비아와 만나 숱한 화젯거리를 남겼다.
 
1994년 6월 24일(이하 한국 시각) 오전 이른 시간 미국 메사추세츠 주 폭스버러의 폭스버러 스타디움. 한국은 월드컵 본선 첫승의 기회를 잡았다. 월드컵 본선에 처음 나서는 볼리비아를 상대로 승리를 노렸다. 볼리비아는 남미예선에서 브라질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지만 독일과 개막전에서 0-1로 패해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반면에 한국은 스페인과 조별리그 1차전에서 후반전 막판 홍명보, 서정원의 극적인 연속골로 2-2 무승부를 거둬 기세가 드높았다.
 
경기는 0의 행진으로 이어졌다. 한국과 볼리비아 모두 승리를 거둬야 16강 진출을 바라볼 수 있었으나 지면 탈락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기 때문에 수비 쪽을 더 탄탄히 했다. 미드필더와 수비수 숫자를 많이 두면서 공격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공격 정확도가 많이 떨어져 득점력이 저하됐다. 한국은 원톱 황선홍이 여러 차례 찬스를 놓쳤으나, 위기의 순간에 최인영 골키퍼가 연속 선방하며 승리에 대한 기대를 계속 품을 수 있었다.
 
이날 경기는 '추가시간 잔치'였다. 전반전에만 추가 시간이 5분 주어졌다. 그리고 후반전 추가 시간이 무려 8분이나 흘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추가시간이 전자식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주심이 판단해 추가 시간을 줬다. 전후반을 합쳐 추가 시간 13분이라는 진기록이 세워졌다. 선수의 큰 부상이나 돌발 변수로 경기가 길게 중단되지 않았으나 월드컵 최장 추가시간으로 기록된 혈투가 이어졌다. '주심의 시계가 고장났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어쨌든 후반전 53분이 되어서야 경기 종료 휘슬이 길게 울렸다. 무려 103분 동안 사투가 펼쳐졌다.
 
1-4-4-1 전형을 기본으로 한 김호호의 원톱 황선홍은 볼리비아전 이후 엄청난 비판에 시달렸다. 최전방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많은 슈팅을 시도했지만 부정확한 마무리로 골문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서 황선홍이 가장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후반 48분 하석주에게 절묘한 힐 패스를 내주며 결승골 기회를 열어줬지만, 하석주가 날린 회심의 왼발 슈팅이 볼리비아 골키퍼에게 막히고 말았다.
 
당시 코치로 대회에 참가했던 허정무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는 사석에서 필자와 만나 "한방만 터지면 이길 수 있었다. 흐름이 매우 좋았다. 선홍이의 힐패스 석주의 왼발 슈팅이 나왔을 때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다"며 월드컵 본선 첫승의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 부분에 대한 진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황선홍 전 감독은 2003년 가진 인터뷰에서 "볼리비아전을 앞두고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골잡이가 골을 못 넣었으니 더이상 할 말이 있겠는가"라며 "독일전에서 골을 넣은 뒤 스스로의 아쉬움이 터져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황선홍은 독일과 조별리그 3차전에서 0-3로 뒤지던 후반전 초반 추격골을 넣은 뒤 화가난 듯한 세리머니로 볼리비아전 무득점 아쉬움을 표출했다.
 
결국 한국과 볼리비아 모두 16강에 오르지 못했다. 한국은 독일과 조별리그 3차전에서 2-3으로 석패했고, 볼리비아는 스페인의 벽에 막혀 조 최하위로 처졌다. 태극전사들은 결과적으로 2무 1패 승점 2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주요 외신들로부터 '가장 아깝게 16강에 오르지 못한 팀'으로 평가 받았다. 만약, 한국이 2차전에서 볼리비아를 눌러 이겼다면 16강 진출이 가능했다. 김호호가 16강의 한 자리를 꿰찼으면 최종 준우승을 차지한 이탈리아가 조별리그에서 탈락의 고배를 들 수도 있었다.
 
옛 기억을 더듬으며 현재를 보니 우리나라 축구가 꽤 많이 발전했다. 여전히 남미에서 중하위권으로 분류되는 볼리비아보다 이제 여러 가지 면에서 한발 앞서 있다. 1994 미국월드컵 볼리비아전 아쉬움 이후 1998 프랑스월드컵 참패를 겪고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냈다. 이후 태극전사들은 계속해서 월드컵에 진출하면서 경쟁력을 높였다. '볼리비아전 홈런'으로 체면을 구겼던 황선홍은 2002 한일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폴란드와 경기에서 결승골을 작렬해 '결자해지'에 성공했다.
 
현재 볼리비아전을 앞두고 벤투호에 소집된 27명의 선수 가운데 13명이 1994년 이후 출생자다. 1994 미국월드컵에 대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선배들이 남긴 추억에 승리라는 덧칠을 해야할 때가 왔다. 태극전사들은 지난해 6월 2018 러시아월드컵을 앞두고 볼리비아를 만나 또다시 0-0 무승부에 그쳤다. 이번에는 시원한 골을 터뜨리면서 승전고를 울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심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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