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정진영 기자] 화려한 조명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만이 연예계의 전부는 아니다. 그런 스타를 발굴하고 콘텐츠를 기획하는 제작자, 조명을 받는 것이 아닌 비추는 기술자, 한 편의 작품이 될 이야기를 찾고 쓰는 작가,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연출가 등 카메라 밖에서도 연예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스포츠경제가 연예계를 한층 풍성하게 만드는 사람들과 만나 직접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코너를 신설했다. <편집자 주>

최근 한센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극 '어느 한센인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 한 때 '나병'이라고도 불렸던 한센병은 최근엔 약물로 충분히 완치 가능하지만 과거엔 살이 짓무르며 신체가 변형되는 데 대한 거부감과 전염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격리하고 피해야 할 질병으로 취급됐다. 이 이야기를 노래극으로 만든 주인공은 배우 겸 연극 연출가 박용범. 그는 연극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경제적으로 솔직히 쉽기야 하겠느냐"고 웃음을 보이면서도 "이 일을 그만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다. 앞이 깜깜할 정도로 힘들다가도 연극계를 떠날 수 없는 건, '어느 한센인 이야기'처럼 세상에 꼭 내놓고 싶은 이야기를 종종 만나기 때문이며, 이를 극으로 올렸을 때 즉각적으로 되돌아오는 관객들의 반응 때문이다. 박 연출은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올 수 없는 연극만의 특별함이 있다"고 힘줘 말했다.

-'어느 한센인 이야기'는 어떻게 세상에 나오게 됐나.

"준비는 2014년~2015년부터 했던 작품이다. 2014년 연말쯤에 경남 산청에 있는 성심원이라는 데를 봉사 형식으로 몇 번 왔다갔다 하다가 한센인 분들을 알게 됐다. 그 분들 말이 자신들이 마지막 세대라는 거다. 70대 이전인 분들은 거의 없고, 원래 성심원에도 한 180분 정도 계셨는데 이제는 한 80분 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성심원도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로 변하고 있더라. 그 분들 사연을 듣고 마음에 묻어 두고 있다가 작년에 우연치 않게 정선 아리랑 하는 친구를 알게 됐다. 정선아리랑은 다른 아리랑과 달리 악보도 없고 구음으로 내려왔던 아리랑이다. 서민들이 힘들고 그럴 때 계속 부르고 계승시킨 거지. 그래서 기본적으로 한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때 한센인들의 한을, 그 바깥으로 표출하지 못 하고 가지고 살았던 한을 정선아리랑과 컬래버해서 표현하면 어떨까 한 거다. 그래서 제안을 했고 선뜻 해보자고 해서 만들게 됐다."

-한센인들의 어떤 이야기가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았나.

"2014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환우 분들이 계시던 병동에서 내가 밤 당직 비슷한 걸 서게 됐다. 그 때 임종방에 한 분이 계셨다. 할머니였는데 그 옆에서 밤새 그 분을 지켰다. 조용한 병실에서 산소호흡기의 '띠- 띠- 띠-' 소리를 듣고 있는데 그 할머니의 삶이 어땠을까 상상을 하게 되더라. 그래서 그 다음부터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몇 개월 동안 왔다갔다 하면서 한센인 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행적들을 찾았다. 사실 나도 70년대 생이니까 어릴 때 동네에서 놀다 한센인 분들을 본 적이 있다. 망태기를 짊어지고 다녔는데, 행색이 초라하고 어떻게 보면 무섭기도 해서 '문둥이'라고 놀리고 '망태 할아버지'라고 하면서 도망치고 했던 것 같다. 아마 우리 세대는 다 알 거다. 그런 이야기들을 그 분들의 시선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 가슴 속에 얼마나 많은 한이 응어리져 있었겠나. 우리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으나 소외됐던 이들의 한을 누군가 한 번은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시각 및 청각장애를 가진 남편과 척추장애를 가진 아내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달팽이의 별'도 연출했다. 사회적 약자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 같다.

"무슨 대단한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소재가 좋고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극화를 시키고자 한 것 뿐이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듣고 보고 싶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해드려야 좋았을 텐데. (웃음) 나는 같이 일하는 배우, 스태프들에게도 그런다. 다큐멘터리 같은 작품을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그러면 어떤 배우들은 '우리가 하는 건 연'극'인데 왜 '극'적이게 하지 않고 밋밋하게 가느냐'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난 또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당신 삶에서 극적인 일이 뭐가 있었느냐'고. 우리가 한평생 산다고 진짜 극적인 일들을 얼마나 겪을까. 대부분 작은 일에 행복해하고 사소한 일에도 크게 상처를 받고 그러지 않나. 그러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무대에서 보여줘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영화처럼 큰 액션이나 판타지적인 걸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달팽이의 별'은 배리어 프리(고령자나 장애인들을 위해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운동. 연극의 경우 장애인들도 즐길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작품을 일컬음)로 제작된 걸로 안다.

"'달팽이의 별'이 실화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거기서 남자 주인공이 시·청각 중복 장애인이다. 자기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데 다른 사람들은 보면서 정작 주인공인 본인이 못 보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이야기를 연극으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신도 알고 싶을 것 아닌가. 그래서 배리어 프리 시스템에 대해 연구를 했고, 몇 개월에 걸쳐 수도 없이 실패한 끝에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휠체어를 탄 관객까지 모두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게 됐다."

-국내 최초 배리어 프리 작품이었다.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엔 배우들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품에 신경을 써도 모자라는데 다른 곳에 신경을 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결과가 나오자 다들 놀라워했다. 시각장애인이 앞줄에 앉아서 귀를 쫑긋하고 집중해서 공연을 감상하는 걸 보니 배우들 입장에서도 얼마나 감동이었겠나. 시각, 청각, 지체 장애인이 같은 연극을 한 공간에서 함께 즐긴다는 것. 개인적으로도 배우, 연출, 제작을 해오면서 가장 보람된 작업이었다. 그래서 이후로도 공연 제작을 할 때면 항상 배리어 프리 방식으로 연극을 제작하고 있다."

-기억에 남는 관객이 있다면.

"'달팽이의 별' 실제 주인공인 영찬 씨는 시각, 청각 중복 장애인이다. 그래서 객석 맨 앞줄에 자리를 마련하고 점자 대본책을 만들어 제공했다. 그의 옆자리에는 척추장애인인 아내 순호 씨가 앉아 함께 연극 관람을 했고, 집에 가서 자신들만의 소통 창구인 점화로 연극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달팽이의 별' 공연 기간 중 시각 장애인으로부터 '시각 장애인도 관람을 할 수 있느냐'는 문의 전화를 받았다. 몇 번을 확인을 하더니 다음 날 공연 시작 2시간 전에 일찌감치 왔더라.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하니 '궁금해서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점점 시력이 나빠지더니 어느 순간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고. 눈이 좋을 때는 연극 보러 자주 다녔는데 시력을 잃고 공연 관람은 생각도 못 했다는 거다. 젊었을 때 즐겨 보러 다녔던 연극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설렌다고 했다. 공연 관람 후 우시는 것도 봤고. 그 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서울 시내 공연장들 돌아다녀 보면 장애인이 들어갈 수 없는 작은 출입구와 높은 문턱이 보인다. 그럴 때마다 씁쓸함을 느낀다. 그들도 관객 아닌가."

-어떻게 하다 연극계에 들어오게 됐나.

"대학 떨어지고 군대에 갔다. 원래 악기를 불었는데 음대에 떨어진 거다. 그러고 제대를 했는데, 그 때만해도 어떻게든 대학은 나와야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 때 우리 큰형이 '학교는 무슨 학교야. 내가 자재를 구할 수 있으니 우리 신발 공장을 하자'고 하더라. 그렇게 신발공장을 한 2년을 했다. 그러다 중국 바이어한테 크게 사기를 당했다. 사회의 쓴 맛을 25살에 본 거지.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있을 때 동네 앞 포장마차에서 밤만 되면 술을 마셨다. 거기서 술 친구를 하나 만났는데, 알고 보니 배우더라. 그 친구의 소개로 민중극단에 들어가게 됐고, 배우로 먼저 일을 하게 됐다."

-그 친구는 아직 연극 하고 있나.

"없다. 내가 진짜 연극 배우로 살면서 한참 힘들 때는 '나 여기 소개시키고 어디갔느냐'고 속으로 이를 갈기도 했다. (웃음)"

-그렇게 힘든데 왜 연극계를 못 떠났나.

"한 번 맛을 봤으니까 그런다.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도 돌아오게 된다. 말로 어떻게 표현을 못 하겠다. 무슨 '스타가 될 거야', '돈을 많이 벌 거야' 이런 게 아니라 진짜 말로 표현을 못 하는 그 매력이 있다. 대본을 딱 들고 거기에 빠져들어가서 대본을 연구하고, 인물을 분석하고,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갔을 때 관객들의 에너지를 느끼는 그 모든 과정이…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질 못 하겠더라고. 연극은 정말 바로바로 결과가 보인다. 그 즉각적인 반응을 보면 미쳐버린다. 불과 몇 개월 만에 결과물이 팍팍 나오니까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1년에 세 작품을 한다고 하면 세 번의 결과물이 나오는 거니까. 그 결과가 어떻든지간에."

-연출로서의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009년~2010년 사이의 일이다. 아빠가 위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병원에서 7개월~8개월 정도 남았다고 하더라. 그리고 정말 딱 선고 받은 그만큼 살다 가셨다. 그 때 호스피스라는 걸 알게 됐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돌아가셨거든.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그곳으로 옮기고 나서 아파하질 않더라. '컨디션 어떠세요' 물으면 '좋다'고 하고 음식도 잘 드셨다. 그러다 어느 날 수녀님이 '48시간 남은 것 같으니 식구들 다 부르시죠' 하더라. 그러면서 호스피스가 뭔지 알게 됐다. 그렇게 제작한 연극이 호스피스의 이야기를 담은 '죽이는 수녀들 이야기'다."

-배우, 연출가로서 박용범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면.

"재미다. 게임도 재미있어야 하지 않나.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나서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면 관객들도 재미있어 하지 않겠나. 사실 일을 하다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가 많다. 제작하다 보면 대출 받고 빚 지고 이런 일도 자주 있다. 스트레스 장난 아니다. (웃음) 그래도 재미있어서 한다. 공연 만들고 뭐 하고 이럴 때가 제일 재미있다. 그게 힘들어도 계속 날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며칠 힘들고 나면 그 힘듦이 보상되는 듯한 결과들이 나온다."

-연극계 진출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한 마디 해준다면.

"배우는 절대 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웃음) 경쟁자도 많고. 소위 배우라고 하면 다들 이병헌, 송강호 같은 큰 배우들 생각을 하겠지만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들 물론 나름대로 꿈을 가지고, 목표의식을 가지고 오겠지만 큰 성공을 좇아 들어올 곳은 아니다. 다들 고위직에 진출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다 대기업에서 일하든지."

-뭐가 그렇게 힘든가.

"돈이지 뭐. 내가 결혼을 못 한 이유도 돈 때문이다. 만약에 이런 상황에서 내가 결혼을 한다고 하면 절대 지금 버는 돈으론 가정 못 꾸린다. 좋은 작품 제작하고 싶어도 결국 돈 때문에 제일 속이 썩는다. 투자해 줄 의향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웃음)"

사진=더하기 이엔티 제공

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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