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정진영 기자] 여기 한국을 떠나 지구 남반구의 어느 작은 섬나라로 이민을 떠나는 이들이 있다. 한국을 떠나 남태평양을 향해 가는 큰 배의 어느 휴게 공간에서 각기 다른 이유로 승선한 탑승객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보낸다. 연극 '남쪽 나라로'는 태평양 망망대해로 들어선 배 안에서 과거와 미래, 절망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선돌극장에서 막을 올린 '남쪽 나라로'는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의 '남쪽으로'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히라타의 초기 작품인 '남쪽으로'는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권태와 무력감에 일본을 버리고 더 작은 섬나라로 떠나는 이들의 사연을 그렸다. '남쪽 나라로'는 배경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꾸고, 경제모순과 불평등, 자연재해 등으로 혼란에 빠진 가까운 미래에 한국을 떠나 남쪽의 먼 나라로 이주해가는 이들을 내세웠다.

원작에 비해 한층 조근조근하고 담백한 '남쪽 나라로'는 시종일관 대화체로 이어진다.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기 보다는 대화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삶을 묘사하는 형식이다. 극에는 부유한 부모와 함께 이민을 떠나는 여자, 이민 컨설팅 회사 직원, 해외에서 한국 식당을 경영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청년, 북한 출신의 밀항자, 독일 출신의 크루즈 청소 스태프, 크루즈 음료 판매점에서 일하는 직원 등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와이파이조차 잡히지 않는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이들이 보이는 배타성, 외로움, 절망, 희망 등은 한국에서도 바다 위에서도, 그 외에 세상 어느 곳에서도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본질적인 감정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특히 한국이 싫어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려 하면서도 한국에서의 생활방식에 전혀 변화를 주지 못 하는 인물들의 이중성이 러닝타임 내내 그려진다. 만나자마자 나이를 묻고 서열을 정리하고, 시민권이니 영주권이니 하며 신분을 나누는 사람들. '남쪽 나라로'에 등장하는 14명의 캐릭터들은 각기 정형화된 어떤 인물 군상을 대표한다. 미래보단 과거를 돌아보면서 추억에 먹이를 주며 사는 남자와 가난을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기면서 자기도 모르게 폭력을 휘두르는 상류층, 크루즈 안에서조차 일에 파묻혀 잠깐의 여유도 즐기지 못 하는 싱글맘 등 주변에서 봤던, 혹은 누구나 자신 안에 가지고 있을 어떤 결함이나 모순점들을 '남쪽 나라로' 속 인물들은 노골적으로 묘사한다. 캐릭터에 대한 적확한 묘사는 다소 잔잔하게 흘러가는 극에 적절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무대 세트는 배를 형상화하고 있다. 관객과 배우가 마치 한 공간에 있는 듯한 열린 구조와 2층으로 층계를 나눠 공간감을 부여한 것이 인상적이다. 이 덕에 각기 다른 캐릭터들의 에피소드가 교차할 때 관객은 마치 자신도 배에 승선한 듯한, 자신 역시 한 명의 승객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얼굴과 배경을 가졌지만 인물들이 한결같이 느끼는 갈등과 고민 같은 감정들은 관객들이 이야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보편성을 부여한다.

과연 기나긴 여정 끝에 등장인물들은 어떤 것을 얻게 될까. 이들은 자신이 한국을 떠나며 목표했던 바를 이룰 수 있을까. '남쪽 나라로'는 관객들을 특정한 결말로 몰고 가지 않는다. 때문에 극장을 나서며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문제를 안고 자신만의 '남쪽 나라'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다음 달 6일까지. 러닝타임 125분. 7세 이상 관람가.

사진='남쪽 나라로' 포스터

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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