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덤' 출연진.

[한국스포츠경제=정진영 기자] 섹시, 청순, 큐티 등 정형화된 이미지로 소비된 걸 그룹. 발라드 활동은 핑클에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근 여성 아이돌 그룹들은 발랄하고 댄서블한 음악으로만 활동하고 있다. 박봄, AOA, 마마무, 오마이걸, 러블리즈, (여자)아이들 등 인기 아이돌 그룹 6팀 간의 경쟁을 전면에 내세운 케이블 채널 Mnet의 '퀸덤'은 업계, 혹은 대중이 걸 그룹들을 그간 어떻게 소비해왔는지를 자각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했다.

■ 걸 그룹이 선 기울어진 운동장

'퀸덤'은 K팝을 선도하는 대세 걸 그룹 6팀이 한 날 한 시에 새 싱글을 발매, 정면 승부를 펼치게 한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다. 소위 '빈집털기'라고 말하는, 막강한 경쟁자가 없을 때 컴백해 차트 및 음악 프로그램 1위를 독식하는 현상을 애초에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룰은 단순하다. 꼴등을 연달아 두 번 하면 불명예 하차. 우승자에겐 컴백쇼를 제작해 준다.

방송이 시작되기만 해도 우려가 많았다. 지금껏 Mnet이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에서 그랬듯이 경쟁과 헐뜯기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는 게 아니냐는 걱정에서다. 하지만 막상 프로그램이 베일을 벗자 긍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다소 MC 장성규가 그룹 간 경쟁을 유도하려는 듯한 발언을 하긴 했지만 출연진이 그런 상황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무대를 잘하는 데 집중하는 면들을 보였기 때문.

방송에서 보면 '퀸덤' 출연진을 움직이게 한 요인은 다른 누군가를 쓰러뜨려야겠다는 경쟁심이 아닌 우승 리워드에 대한 욕심이었다. '퀸덤'이 우승 상품으로 내건 컴백쇼는 걸 그룹들에게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 콘서트를 열지 않는 이상 보여주기 어려운 무대들을 컴백쇼를 하게 되면 모두 펼쳐놓을 수 있다. 미처 방송에서 다 발산하지 못 한 매력을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셈이다.

'퀸덤'에 출연한 여러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컴백쇼를 열어준다는 이야기에 "우승에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우승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고 털어놨다. 여기서 AOA의 설현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컴백쇼는) 인기 많은 남자 아이돌만의 특권이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

'퀸덤'에서 인상적인 활약 펼치고 있는 (여자)아이들.

실제 2014년부터 올해까지 지난 5년 여 간 Mnet에서는 방탄소년단, 워너원, 비, 김범수, 에이티즈 등 여러 남성 가수들의 단독 컴백쇼를 내보냈다. 같은 기간 컴백쇼를 가진 여성 아팃스트는 헤이즈와 아이즈원이 전부다. 여기서 아이즈원은 Mnet이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을 통해 데뷔시킨 그룹이다. 앞서 '프로듀스 101' 시즌 1을 통해 데뷔한 아이오아이의 경우 컴백쇼는 아니지만 근황과 신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오아이 컴백 카운트다운'이란 1회성 단독 프로그램을 맡아 한 적이 있긴 하다.

결국 걸 그룹들은 한동안 자신이 직접 컴백쇼를 기획해 인터넷 프로그램으로 제작하거나 쇼케이스를 온라인으로 생중계하지 않고서는 새 앨범에 담고 싶었던 다양한 이야기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대중 앞에 보여주기 어려웠다.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은 걸 그룹들을 점점 특정 이미지에 갇히게 하는 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 '꽃' 아닌 '나무'가 된 걸 그룹

'퀸덤' 속 걸 그룹들의 활약에 더 주목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대중에게는 지금까지 충분히 걸 그룹들의 매력을 발견할 기회가 부족했다. 예컨대 AOA는 특정 신체 부위를 강조한 춤이나 '짧은 치마', '익스큐즈 미' 등 섹시한 콘셉트의 노래들로 유명했다. 보이 그룹에 비해 콘서트를 방문하거나 굿즈를 구입하는 등의 코어한 팬층이 얕은 걸 그룹들은 결국 화제성과 이미지로 연예 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많은 걸 그룹들이 노출처럼 말이 많이 나오는 강수를 선택하게 되는 이유다. 한 업계 관계자는 "보이 그룹들은 앨범 하나를 내더라도 퀄리티를 많이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실제 앨범을 구매하는 팬들이 많이 있고, 이들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걸 그룹의 경우 앨범을 열성적으로 구매하는 팬들보다는 행사에 와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거나 이를 온라인에 올려 소통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팬들이 많다. 때문에 걸 그룹들의 활동은 자주 화제성에 초점을 맞춰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AOA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짧은 치마'로 흥한 AOA는 '단발머리', '심쿵해', '굿 럭', '익스큐즈 미'에 이르기까지 줄곧 섹시한 이미지를 이어갔다. 'AOA=섹시'라는 공식이 자리매김했다. 그랬던 그들이 직접 '짧은 치마'의 무대를 구성하고, 마마무의 '너나 해'를 편곡한 무대에 슈트를 입고 등장했을 때 많은 이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감추지 못 했다. '너나 해' 무대에서 AOA의 멤버 지민은 "솜털이 질 때 벚꽃도 지겠지. 난 꽃처럼 지긴 싫어. 아임 더 트리(나는 나무야)"라고 랩을 했다. 늘 어리고 화려하고 섹시하기를 강요받았던 걸 그룹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가사였다.

'퀸덤'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는 그룹 AOA.

'퀸덤'은 걸 그룹들은 가만히 앉아서 입혀 주는 옷을 입고 시키는대로 노래를 하고 춤을 출 거라고 생각했던 대중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깼다. 인형 같은 이미지의 오마이걸은 자신들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러블리즈의 '데스티니'로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멤버들끼리 회의를 했고, 동양적 선율과 퍼포먼스를 얹은 무대로 크게 호평을 받으며 2차 경연 1위에 올랐다. (여자)아이들은 소연을 중심으로한 체계적인 작업 과정을 방송을 통해 노출함으로써 프로듀싱 능력까지 입증했다. 박봄은 유일한 솔로 뮤지션임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꽉 채우는 독보적인 음색으로 매 회 시청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데뷔 10년을 넘은 베테랑 가수가 후배들과 경쟁하면서 매 회 더 잘하고자 머리를 싸매고 후배들에게 직접 조언을 구한는 부분은 지금껏 그 어느 여성 중심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보지 못 한 장면이었다.

좋든 싫든 '퀸덤' 출연은 참가한 아이돌 그룹들의 많은 부분을 바꿔놨다. 앞으로 이들이 하던 음악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고, 큰 변화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꽃이 아닌 나무가 되기로 선언한 걸 그룹.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퀸덤' 출연진이 어디까지 무럭무럭 성장할 수 있을지, 또 그런 그들의 활약이 다른 걸 그룹들, 나아가 가요계 전반에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몰고올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사진=OSEN, FNC엔터테인먼트 제공

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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