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 지역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함주지. 박대웅 기자

[한스경제=박대웅 기자] 조선 성종 때 경상도 함안에 절세 미녀가 있었다. 미녀의 이름은 노아(蘆兒). 노아의 부친은 죽을 죄(사죄·死罪)를 지었다.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일인 만큼 지방 수령이 처리할 수 없어 중앙에서 판관을 내려보냈다. 
 
노아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기적에 입적해 기생이 됐다. 그는 매력적인 미모와 학식까지 있어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였다. 판관이 내려오자 노아는 형방(形房)에 돈을 써 천침(薦枕·잠자리에서 모심)을 자청했고, 판관은 노아의 자색에 반해 그의 아비를 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 같이 함안으로 내려온 판관들은 노아의 품속에서 녹아버리는 전철을 밟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 대신들은 이번에는 그야말로 강직함과 엄격함으로 이름 높은 사헌부 지평 최모 판관을 함안으로 내려보낸다. 그는 융통성이 없고 청렴한 젊은 학자로 "준엄한 왕명을 받고 옥을 다스릴 자가 계집에 현혹돼 사명을 다하지 못하니 노아는 요물일 것"이라며 "내가 내려가면 얼굴조차 안 볼 것이고 판관을 홀린 죄를 물어 죽여버릴 것"이라고 장담했다.
 
최 판관이 내려온다는 소식은 함안에 퍼졌다. 노아는 함안에서 40리 떨어진 칠원 영포역(驛)으로 가서 뇌물을 주고 역장 내외를 구워삶았다. 그러고는 분기 없는 얼굴에 소복을 입고 시골 아낙네가 어사의 행차를 구경하는 흉내를 내며 역참의 부엌과 마당을 오갔다. 무심코 노아를 본 최 판관은 노아의 단아한 모습에 설레기 시작했다. 점심만 먹고 떠나야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우물쭈물했고, 그날 저녁 노아와 밤을 함께 했다.
 
판관은 밝아오는 아침을 아쉬워하며 "내가 죽은들 너를, 이 밤을 잊을 수 있으랴"고 실토했고, 노아는 실에 먹을 묻혀 판관의 이름을 자기 팔뚝에 새기게 하고 하룻밤의 정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판관은 노아의 팔에 시 한 수를 남기고 떠났다. 
 
관정을 찾은 판관은 노아와 아비를 잡아들이고 죄를 물었다. 노아는 공초(供草·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적은 문서)를 보시고 벌을 내려달라고 읍소했다. 판관은 사령을 시켜 노아가 써온 공초를 들이라 했다. 공초에는 먼저 자기 아비의 억울한 사연이 조리 있게 적혀 있었고, 이어 별지에 시 한 편이 쓰여 있었다.
 
蘆兒玉臂是誰名 刻入肌膚字字明
寧見洛東江水盡 妾心終不負初盟
(노아의 옥 같은 흰 팔에 새겨진 이름은 누구인고
살갗에 깊이 새겨진 글씨가 뚜렷하구나
차라리 낙동강 물이 마르는 것을 볼지라도
이 마음은 끝끝내 첫 맹세에 어긋남이 없소이다)
 
판관은 까무러치게 놀랐다. 지난 밤 영포마을에서 자신이 써준 시였다. 판관은 노아의 술수에 빠진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는 노아를 옥에서 풀어준 뒤 복통을 호소했고, 와병을 구실로 사표를 냈다. 사람들은 최 판관을 '함안차사(咸安差使)'라 불렀다. 
 
노아의 이야기는 함안 지역의 재미난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는 뜻의 '함주지'에 실렸고, 이후 함안차사는 부패한 과리를 조롱하고 풍자하는 목적으로 회자되고 있다. 

박대웅 기자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