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편집자] 9월이 시작된 어느 가을날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을 때 경내의 상사화(相思花)가 활짝 펴 있었다.

분홍빛 상사화가 가을 햇빛 아래 고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다. 상사화의 군락은 도심 속 번잡스러움보다 시골길목의 고즈넉한 풍경과 어울릴 때 제격이다.

상사화의 잎은 봄에 나와 여름철에 지고, 꽃대는 여름시작 무렵 자라나 가을초입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꽃이 필 때 잎은 없고 잎이 자랄 때는 꽃이 피지 않아 꽃과 잎은 서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상사화는 그 이름처럼 꽃과 잎이 ‘부조화’속에 서로를 그리워한다.

이러한 ‘부조화’가 경제적 시각으로 변주된 표현이 ‘상충관계(Trade off)’다. 어느 한쪽의 희생이 없으면 서로가 공존할 수 없는 존재형태다.

‘상충관계’를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경제학 이론이 ‘필립스 곡선’이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필립스’가 발견한 개념이다.

영국의 약 100년간의 통계자료를 경험적으로 분석했다. 실업률이 낮아지면 임금상승률이 높아지고 실업률이 높아지면 임금상승률이 낮아진다는 결과를 바탕으로 반비례되는 ‘부조화’현상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필립스 곡선’은 명목임금상승률과 실업률 사이의 관계를 나타냈다.

이후 경제가 총수요 등락 과정에서 물가와 임금이 동반 상승하는 현상이 관찰되면서 임금상승률대신 물가상승률로 대체하게 된다. 그래서 물가상승률과 실업률 사이의 매우 안정적인 역의 함수관계를 설명하는 모델이다.

결국 ‘물가안정’과 ‘고용안정’의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우하향’하는 ‘필립스 곡선’상의 한 조합을 선택해 원하는 방식으로 경제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필립스 곡선’이 생명을 다한 이론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200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에드먼드 펠프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스태그플레이션(물가와 실업률 동반상승) 상황에서 ‘필립스 곡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특히 글로벌금융위기이후 급속히 진행된 세계화로 인한 ‘국제 공급망’의 확대와 ‘기술혁신’의 영향이 더해져 물가상승으로 이어지지 않고, ‘아마존 효과’에 따른 ‘가격혁신’ 등이 ‘필립스 곡선’의 오작동을 야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 경제에도 이러한 변화의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들어 평균 실업률이 1/4분기 4.5%, 2/4분기 4.1%, 3/4분기 3.3%로, 9월 기준의 3.1%는 2014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지난 8월(-0.04%), 9월(-0.45%)로 마이너스를 이어갔다.

숫자만 놓고 보면 ‘필립스 곡선’이 뚜렷한 ‘평탄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와 맞물려 고령화로 인한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필립스 곡선’의 오작동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이다.

경제학에서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였던 전통적 ‘필립스 곡선’의 위상이 추락하고 있다.

칼럼리스트=이치한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