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편집자]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 나태주 시인이 11월을 주제로 쓴 시의 첫 구절이다. 짧은 소회이지만 큰 울림이 묻어난다. 흔히 11월은 특색이 없는 달이라고 한다. 1월이나 12월처럼 한 해의 시작과 끝도 아니고 공휴일이 하루도 들어 있지 않는 달이다.

그럼에도 11월은 긴 문장 속 쉼표와 같다. 가을의 끝과 겨울이 시작하는 경계에 존재하는 ‘생각의 공간’이다. 11월에는 눈길 닿는 곳마다 생각이 피어난다. 지난 9일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이하는 장면을 접하면서 ‘우연’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일상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의 배경에도 ‘우연’이 좌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짐작하듯이 ‘수능한파’라는 징크스도 그냥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말일 게다. 실제로 ‘베를린장벽 붕괴’의 단초는 한 인물의 실언에서 비롯된다. 바로 전 동독 공산당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다. 그는 당시 한 기자회견에서 여행자유화 정책에 대한 내각결정을 발표했다. 회견도중 이탈리아의 한 기자가 “언제부터 시행되느냐”고 묻자 새 정책을 숙지하지 못한 그는 얼떨결에 ‘지금부터’라고 답했다. 사실 이 결정은 이튿날부터 발효될 예정이었고, 출국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관련기관에 신청해야 하는 절차가 따랐다.

그러나 독일어에 서툰 이탈리아 기자가 이를 오해하여 본국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고 타전하면서 전 세계에 긴급뉴스로 전파됐다. 이를 본 동베를린의 수많은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가는 검문소로 향했고, 동독 경비병들은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서독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붕괴직전의 체제를 지키려 했던 동독정권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말실수와 오보가 겹쳐진 ‘우연’으로 인해 베를린장벽은 쉽게 붕괴되고 말았다.

이 여세를 몰아 이듬해 45년간의 분단 현실을 딛고 통일로 이어졌다. 이같이 역사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보다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더 많이 변화해 왔다. 사실 모든 세상사가 큰 관점에서는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 순간마다 ‘우연’이 쌓여 작용하고 있다. 이렇듯 삶이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지만, 최근 들어서 우리 경제에 미치는 ‘우연적 요소’의 힘은 더욱 강력해 지고 있다.

국내 30대기업 중 절반 이상인 57%가 중·장기 전략을 재검토한다는 소식이다. 높아진 시장 불확실성과 돌발변수의 발생 등으로 새로운 사업계획을 짜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경영환경에 드리운 ‘블랙스완’의 그림자와 ‘팻테일 리스크’의 발생이 잦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제 ‘우연’이 필수환경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11월은 기업들이 내년도 사업계획을 수립하는 시즌이다. ‘우연’에 대비한 ‘예상 밖의 것을 예상’하는 ‘시나리오 플래닝’이 필요하다. ‘우연’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전략이다.

칼럼리스트=이치한

저작권자 © 한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