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정진영 기자] 2019년은 한국 힙합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한 해로 남을지 모르겠다. 잊을만하면 논란, 특히 '여성 혐오' 논란을 일으키는 한국 힙합계에서 약자 혐오에 반기를 들고 나선 래퍼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한국 힙합계에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젊은 래퍼들. 약자 혐오 표현이 나올까 마음을 졸이지 않고 안심하고 들어도 될 한국 힙합의 얼굴들을 소개한다.

■ '창X'-'꽃X' 안 쓰면 스웩이 안 나오나

국내 힙합의 원류를 찾아가다 보면 눈에 띄는 앨범이 하나 있다. 1999년 2월에 발매된 '1999 대한민국'이다. 업타운, 허니패밀리, t윤미래, 김진표, 디바, 드렁큰타이거, 혁건, 허인창 등 국내 1세대 힙합 뮤지션이라 할 수 있는 32인이 모여 만든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21세기를 앞둔 1990년대 말 힙합은 혼란한 사회와 다가올 새로운 세기에 대한 불안감 등을 노래했다. '1999 대한민국'의 타이틀 곡인 '우리 같이해요'는 IMF 사태 이후 높아져 가는 실업률과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힘을 내요.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이 아닌 우리들의 사랑으로 말이죠"라고 용기를 준다. 또 역시 이 앨범에 수록된 '랩교'나 박명호의 '야호'(2002) 같은 노래들을 보면 한국 랩의 뿌리는 한국어임을 강조하며 한국 힙합만의 물결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볼 수 있다.

여성 기자와 간호사를 성적대상화한 형돈이와 대준이 '멈블' MV 장면.

이렇게 약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한국 힙합만의 스타일을 찾으려던 1세대 힙합씬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최근 국내 힙합계는 약자 혐오와 범죄, 디스전 등으로 얼룩져 있다. "남자는 주먹, 여자는 보지. 그래서 항상 난 너를 이길 수가 없지"(한해, '가위바위보', 2015), "언제나 적당히라는 말 병X 같애"(스윙스, '터프', 2019),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을 막아. 이럴 생각까진 없었는데 했어 강X"(블랙넛, '졸업앨범', 2015), "상남자 상남자 남자니까 여자보단 늘 위니까"(크리스피 크런치, '상남자', 2017) 같은 여성, 장애인 등을 비하하는 가사가 만연하고, 마약 투약, 재물손괴, 성추행, 탈세 등 각종 범죄 혐의에 연루된 래퍼들도 다수다. '꽃X'이나 '마더XX', '창X' 등 여성 혐오 표현들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힙합 뮤지션들이 여전히 즐겨 사용하고 있다.

"여자가 집이라면 난 빌리지를 소유하고 있겠지"(챙스타, '스펌 맨', 2017)라며 여성과 교제하는 걸 일종의 트로피처럼 과시하는 문화도 여전하다. 빅뱅의 '베베'(2015), 형돈이와 대준이 '멈블'(2019), 라비 '밤'(2017)처럼 여성을 성적대상화한 장면을 삽입한 뮤직비디오도 다수다. 이 가운데는 라비처럼 잘못을 사과한 뮤지션도 있지만 대부분은 피드백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리코, 슬릭 등을 보유한 힙합 레이블 데이즈얼라이브의 수장 제리케이는 여성은 물론 동물, 성소수자 등 여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대표적인 힙합 아티스트다. 산이가 '페미니스트', '6.9'란 노래로 페미니스트들을 저격했을 때 맞디스곡을 내기도 했다. 

과거 여성 혐오 표현들을 가사에 썼던 데 대해 반성의 뜻을 보인 제리케이.

흥미로운 건 제리케이 역시 과거 "여자완 달리 벌리는 것보다 접는 게 더 어려웠어. 회사란 건 말이지"('노바디 벗 미', 2012), "술 한잔 하는 너는 애완동물이야. 주인 없으면 굶는 것처럼 남자 없으면 니 가치는 없어져"('유아 낫 어 레이디', 2012) 같은 여성 혐오 가사를 종종 썼던 뮤지션이라는 점. 하지만 그는 이를 불편해 하는 많은 리스너들의 피드백을 받아들였고, 공식 트위터에 "앞으로도 돌아봤을 때 부끄러운 뭔가를 또 내놓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씩 덜 멍청해지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글을 올리며 반성의 뜻을 보였다. 자신의 SNS를 통해 꾸준히 페미니즘, 동물권 신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 신장 등을 위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 "같이 타파하자 가부장제 뭘 망설여 36.7% 임금격차 토막 내 그럼 님이 원하는 대로 언제든 돈 반반 내"라는 '노 유아 낫'(산이 디스곡)의 가사는 제리케이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자신의 음악에 어떻게 녹이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 힙합=남성 전유물? 편견 깬 래퍼들

Mnet 서바이벌 프로그램 '고등래퍼3'에서 여성 래퍼인 이영지가 우승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힙합 하면 남성 래퍼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헐벗은 여성 댄서들이 남성 래퍼의 옆에서 엉덩이를 흔드는 장면이 뮤직비디오에서 끈임 없이 재생산되는 시장은 좋은 실력과 대중적 인지도를 가진 여성 래퍼들이 많음에도 힙합을 남성의 전유물처럼 느끼게 한다.

래퍼 최삼.
래퍼 슬릭.

이런 상황에서도 꾸준히 혐오와 논란이 힙합의 전부가 아니라며 클린한 힙합 하기 위해 애쓰는 여성 힙합퍼들이 있다. 대표적으론 약자, 여성 혐오 표현에 반기 들고 2014년 정식 데뷔한 최삼을 꼽을 수 있다. 최삼의 가치관이 잘 담긴 앨범을 찾자면 지난 해 발매한 '터부'를 꼽을 수 있다. 이 앨범에 수록된 '할 만큼 했다'에서 최삼은 "능력, 여자 자랑 전에 챙겨라 네 옆의 형제"라며 한국 힙합이 봐야 할 방향을 꼬집고, '꽃뱀'에서는 "내가 아주 걸레 같은 X이라고 해봐. 내가 줘도 안 먹을 X이라고도 해봐. 나 같은 X은 차고 넘친다면서 날 왜 봐. 너 계속 뱉은 말 내 앞에서도 해 봐"라며 여성 혐오에 당당히 목소리를 낸다.

데이즈얼라이브 소속 슬릭은 여성으로서 자신이 경험한 바를 노래에 녹여 비슷한 처지에 놓인 여성들을 위로하는 래퍼다. 이런 슬릭의 음악적 경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곡은 '마 걸스'(2017)다. 이 곡에서 슬릭은 "니가 느끼는 슬픔과 불안함은 모조리 다 내가 들이마셔 버릴 테니까 넌 마음 놔도 돼", "나는 나와 같은 얼굴을 가진 몇만 명의 나의 방패"라며 고통의 나눔과 연대를 노래했다. 이후 슬릭은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래퍼로부터 "누가 널 죽여, 누가 너를 강X해. 피해의식 오져 더 나은 사횔 위한단 개소리" 같은 디스를 당하기도 했으나 지난 1월 '아임 오케이'란 곡을 발표, "난 괜찮아 견딜만해 또 아님 말어 걍 아님 말어 난 괜찮아", "눈치 안 보는 너가 눈치 안 보고 하는 말이 갑자기 분위길 싸하게 하는 이유를 아니. 그걸 안다면 날 듣고 화나진 않았겠지"라는 의연한 태도로 계속 음악을 해나갈 의지를 보였다.

사진=형돈이와 대준이 '멈블' MV 캡처, 제리케이, 최삼, 슬릭 인스타그램

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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