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소탈한 자연인·인재 중시…‘강토소국 기술대국’ 직접 실천
17일 오전 故 구자경 LG 명예회장 발인식이 가족과 친인척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한 대형병원에서 비공개로 엄수됐다. /LG 제공

[한스경제=이승훈 기자] 국내 재계에 큰 업적을 남긴 고(故)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발인이 17일 서울 모 대형병원에서 비공개로 엄수됐다. 하늘도 슬퍼하듯 비가 내린 이날, 발인식은 고인의 소박한 장례의 뜻에 따라 별도 영결식 없이 유가족들과 친인척, 일부 임직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17일 LG그룹에 따르면 지난 14일 향년 94세로 별세한 구자경 명예회장의 발인식은 이날 오전 8시경부터 빈소가 마련된 병원에서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날 발인식에는 고 구자경 명예회장의 자녀 등 유가족들과 구자열 LS 회장, 구자균 LS산전 회장, 구자은 LS엠트론 회장,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허동수 GS칼텍스 명예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허태수 GS그룹 회장, 허세홍 GS칼텍스 사장, 허윤홍 GS건설 사장, 허정수 GS네오텍 회장, 허승조 태광그룹 일주 학술문화재단 이사장 등 LS와 GS그룹 경영진, 권영수 LG 부회장과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 등 LG 임원들이 참석했다.

발인식은 묵념과 추도사,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추도사는 이문호 LG공익재단 이사장이 했다.

이 이사장은 "구 명예회장님은 대한민국 산업의 역사를 쓰신 분이요, LG의 역사셨다. 현장 사원들과 같은 눈높이로 너털웃음을 나누시던 큰형님 같은 경영인이셨다"며 "모두가 존경하고 사랑했던 큰 별인 상남(上南) 회장님을 잊지 않겠다"고 애도했다. 상남은 구 명예회장이 고향집 앞 작은 다리 이름에서 따온 호다.

평소 소탈했던 구 명예회장의 품성 그대로 별도의 영결식 없이 간소하게 치러진 비공개 발인식 후 운구차가 병원을 떠났다. 구 명예회장의 시신은 화장 후 안치될 예정으로 장지도 유족들의 요청에 따라 역시 공개되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 임종을 맞을 때까지 분재와 난 가꾸기 등 소박한 꿈들을 실천하며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보냈고, 인재 양성을 위한 공익 활동에 헌신했다.

구 명예회장은 지난 1925년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명예회장의 6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 명예회장의 유년시절 장래 희망은 교사였다.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교사로 근무하던 구 명예회장은 1947년 부친 구인회 회장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당시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날로 번창하며 일손이 모자라자 구자경 명예회장은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도우며 지냈다. 구 명예회장은 회사로 들어오라는 부친의 부름에 따라 1950년 교편을 놓고 락희화학 이사로 취임하며 본격적으로 기업인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20여 년간 현장에서 경영수업을 쌓다가 부친의 작고 후 1970년 45세의 나이에 2대 회장에 올라 1995년 은퇴할 때까지 25년간 LG그룹을 이끌었다.

구 명예회장은 재임 기간 전자와 화학을 주력으로 삼아 LG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시키고 우리나라 산업의 고도화에도 기여했다. 취임 당시 260억원이었던 매출은 30조원대로 약 1150배 증가했고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늘었다.

그는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국토는 작지만 기술 경쟁력이 뛰어난 나라)이라는 경영 철학을 바탕으로 연구개발(R&D)를 통한 기술개발과 인재 육성에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회장 재임 동안 설립된 연구소는 70여개에 이른다.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려면 뛰어난 기술자가 많아야 한다. 세계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 지식과 지혜를 결합해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구 명예 회장의 지론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내 최고의 가전 회사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해외 진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유럽, 미주 지역에 LG전자와 LG화학의 해외공장 건설을 추진해 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또 구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당시 이례적으로 '투명 경영'을 강조하며 민간기업 최초로 락희화학 기업공개를 진행하는 등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또한 1972년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추대돼 2년 간 임기를 맡기도 했다.

회장직을 퇴임하기 직전인 1990년 무렵에는 '자율책임 경영체제'를 확립해 각 계열사 전문경영인에게 재량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는 LG가 2003년 국내 대기업 집단 가운데 최초로 순수 지주사를 세우고, ‘집단 지성’으로 최적의 경영 결정을 내리는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고인은 지난 1994년 럭키금성 사명을 LG로 바꾼 뒤, 다음 해 2월 장남인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돼 아직도 재계에서 회자한다.

유족으로는 장녀 구훤미씨, 차남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삼남 구본준 전 LG그룹 부회장, 차녀 구미정씨, 사남 구본식 LT그룹 회장 등이 있다. 장남인 구본무 회장은 지난해 5월,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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