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 현장. 체육진흥공단 제공

[한스경제=박대웅 기자] 한일전은 언제나 손에 땀을 쥐게하는 긴장감과 기대를 갖게 하는 스포츠 더비다. 아무리 비인기 종목이라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이 폭증하는 일종의 버프가 있는 단두대 매치가 바로 한일전이다. 지금부터 39년 전인 1981년. 한일 양국의 자존심을 건 한일전 승부가 있었다. 한일 양국은 지구촌의 큰 축제 올림픽 유치를 두고 맞붙었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렸다. 이날 총회는 1998년 올림픽 개최지 선정 작업을 진행했다. 개최 희망국은 대한민국 서울과 일본 나고야였다. 당시 분위기는 일본에 상당히 기울어진 상황. 외국 언론은 발표가 나기 전부터 나고야가 승리했다는 기사를 미리 준비하기도 했다. 한국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투표 결과는 서울의 대역전승이었다. 서울 52표, 나고야 27표. '바덴바덴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온 국민을 감동에 젖게 했던 1988 서울올림픽이 올해로 벌써 32돌을 맞았다. 본지는 창간 5주년을 맞아 32년 전 서울올림픽 영광을 되돌아 본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다. 체육진흥공단

◆ 환희와 희열의 순간들

'바덴바덴의 기적' 후 한국은 7년 간 모두 2조3826억 원의 자금을 투자해 올림픽을 준비했다.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은 5만276명으로 그야말로 온 국민이 서울올림픽을 맞았다. 그런 만큼 서울올림픽은 국민들에게 환희와 희열을 안겼다. 

먼저 서울올림픽 첫 번째 금메달은 레슬링에서 나왔다. 1988년 9월21일. 대회 5일째였던 이날은 한국 레슬링 간판 김영남의 결승전 무대가 펼쳐졌던 날이다. 당시 김영남은 소련의 토를리 하노프를 상대로 목감아 돌리기로 제압하며 첫 번째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두 번째는 여자 핸드볼이다. 1988년 9월29일 소련과 결승 리그 마지막 경기가 열렸다. 경기 직전까지 우승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앞서 유고와 조별리그에서 얻은 1패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기 직전 희소속이 들려왔다. 노르웨이가 유고를 이기면서 한국의 우승 가능성이 생겼다. 국기 종목 최초의 금메달을 눈앞에 둔 우리 선수들은 신장은 평균 10cm나 더 작고 몸집도 더 가녀린 신체조건을 극복하고 소련을 제압하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최종 스코어는 21-19.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따낸 순간이다. 

세 번째는 탁구에서 나왔다. 한국 여자탁구의전성기를 이끈 현정화, 양영자가 감독의 주인공이다. 현정화-양영자는 당시 최강 중국을 상대로 우승을 거머쥐며 전 국민을 열광케 했다. 탁구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고 한국의 첫 올림픽 금메달따며 챔피언 자리에 오른 순간은 1988 서울올림픽 환희의 순간 중 하나다. 

네 번째는 전통의 메달 밭 양궁이다. 주인공은 김수녕이다. 당시 양궁은 지금과 다소 다른 룰을 채택했다. 현재는 토너먼트 방식이지만 당시에는 거리별 싱글 라운드 성적을 합산하는 FITA 그랜드 라운드 방식으로 진행됐다. 1988년 9월30일 열린 여자개인전 8강 결승에서 김수녕은 첫 거리인 30m의 9발 모두를 10점에 쏘며 쾌조의 출발을 했다. 하지만 50m에선 첫발을 6점에 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시위를 떠난 화살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김수녕은 곧바로 다음 화살을 10점에 꽂아 넘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총점 344점을 획득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 열린 여자 양궁 단체전에서도 김수녕의 금메달 행진은 계속됐다. 김수녕은 왕희경, 윤영숙과 함께 합심해 두 번째 금메달을 따냈다. 이 메달로 김수녕은 17세의 나이로 올림픽 2관왕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모두 33개의 메달을 획득한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로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종합 4위로 대회를 마쳤다. 

독일의 수영 여왕 크리스틴 오토(사진)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대회 6관왕을 차지했다. 

◆ 1시간 만에 세계新 2개, 쏟아진 기록들

1988 서울올림픽에선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기록들이 쏟아졌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육해상 선수 그리피스 조이너를 꼽을 수 있다. 그는 하루에 세계신기록을 두 번이나 세우는 등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했다. 여자 200m 준결선에 나선 그리피스 조이너는 종전 세계신기록을 0.15초 단축했다. 이어 같은 날 1시간40분 뒤 열린 결선에서 앞서 자신이 기록한 세계신기록을 무려 0.22초나 줄이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기록을 세웠다.

동독의 '수영 여왕' 크리스틴 오토도 전대미문의 역사를 썼다. 오토는 여자 50m 자유형, 100m 자유형, 100m 접영, 4x100m 자유형 계주, 4x100m 혼계영 계주까지 모두 6개의 금메달을 수확하며 수영 여왕의 면모를 유감 없이 뽐냈다. 그는 8관왕을 차지한 마이클 펠프스(남·미국) 이전까지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딴 선수로 기록됐다. 

1988 서울올림픽은 이들을 포함해 모두 33개의 세계신기록을 배출했다. 이 외에도 세계타이기록 5개, 올림픽 신기록 227개, 올림픽 타이기록 42개도 수립됐다. 신기록이 하나도 없던 1984년 LA올림픽과 비교했을 때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해도 남을 '역대급 대회'였다. 

88서울올림픽의 유산을 이은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체육진흥에 다방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 서울올림픽 유산의 현재 모습은

1988서울올림픽이 성대한 막을 내리고 남겨진 올림픽 유산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고심이 깊어졌다. 올림픽 유산 활용을 위해 1989년 4월 국민체육진흥공단(이하 체진공)이 설립됐다. 체진공은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고 올림픽 공원과 경기장의 효율적인 사용 그리고 국민체육진흥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체진공은 서울올림픽 잉여금 3521억 원을 기초 재원으로 출발해 현재 스포츠토토와 경륜, 경정 사업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기금은 국내외 대회 개최 지원과 올림픽 스타 양성, 생활체육과 장애인 체육 지원 등 다방면에 쓰인다. 

구체적으로 보면 1989년부터 1999년까지 청소년 육성에 774억 원, 올림픽 기념사업에 271억 원을 썼다. 이어 1999년부터 2001년까지는 월드컵 개최를 위해 월드컵 경기장 건설비 2103억 원을 지원해 서울 상암 경기장을 포함 6개 도시 경기장을 건설했다. 2004년부터는 생활체육시설 인프라 확충과 소외 계층 및 저소득층 스포츠 복지 향상과 체육인 일자리 제공 사업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2006년부터는 장애인의 생활체육 및 전문체육 저변 확대를 위해 지원 규모를 늘렸다.  2011년 대구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대회 유치지원 및 국가적 차원에서 성공 개최를 위한 전문 체육 지원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박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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