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V리그ㆍ국가대표 레전드 리베로 김해란 은퇴
‘1만 디그’ 기록 코앞에 두고 코트 떠나기로
“아쉽지만 지금 1순위는 가정과 아기”
흥국생명 김해란(왼쪽)과 이재영. /OSEN

[한국스포츠경제=이상빈 기자]

“후배들의 ‘언니가 제 롤모델이다’는 말이 가장 듣기 좋았고 ‘국가대표’ 하면 ‘김해란 리베로’라고 한 팬들의 반응도 뿌듯했어요.”

여자배구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의 베테랑 리베로 김해란(36)은 13일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로 이 두 가지를 꼽으며 지난 18년 동안의 선수 생활을 돌아봤다.

김해란은 프로배구 V리그 출범 전인 2002년 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 유니폼을 입고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정확히 18년 만인 2020년 정든 코트를 떠난다. 여자배구에서 그가 쌓은 업적은 대단하다. 424경기 9816개 디그 성공이라는 이 부문 역대 1위 대기록을 남겼다. 소속팀은 물론 한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에서 존재감도 빛났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 2012 런던올림픽, 2014 인천아시안게임, 2016 리우올림픽에 주전 리베로로 코트를 종횡무진 누볐다. 팬들의 평가처럼 ‘국가대표 리베로’는 김해란 그 자체였다.

2018-2019시즌 흥국생명에서 통합 우승을 이룬 김해란. /흥국생명

1만 디그 성공이 눈앞까지 다가왔고 이듬해 2020 도쿄올림픽 출전도 유력하지만 더는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은퇴를 선택했다. 김해란은 “기록은 잘 몰랐다. 물론 아쉬움이 없으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기록 달성을 위해 선수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다”며 “제 목표가 박수 칠 때 떠나는 것이다. 저한테 1순위는 가정이고 아기다. 아쉬울 때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은퇴를 결정한 배경을 털어놨다.

결혼 7년 차지만 아이가 없다. 선수 커리어를 위해 가정의 계획을 잠시 접은 게 30대 중후반까지 이어졌다. 기록이 늘어갈수록 미래의 아이와 만남은 멀어졌다. 2020년 마침내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동안 시즌을 치르며 꾸준히 머릿속에 되새긴 코트와 작별을 실현하는 시기가 다가왔다고 느꼈다.

김해란은 “은퇴는 늘 생각했다. 목표는 33세까지였다. 매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지난 시즌에 가장 많이 생각했다”며 “정상에 있을 때 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너무 아쉬워서 1년만 더 해보고 우승을 또 하고 은퇴하고 싶었다. 1년을 더 미룬 거다”고 밝혔다.

2018-2019시즌 흥국생명은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까지 석권했다. 주전 리베로로 활약한 김해란에겐 커리어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이다. 올 시즌을 마치고 떠난다는 마음의 결정을 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V리그 여자부 2019-2020시즌이 중도에 마감하자 자연스럽게 은퇴 수순을 밟았다. 김해란은 “천천히 내려놓고 있었다. 언젠가는 선수를 내려놔야 하는 거잖냐. 지금도 계속 내려놓고 있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김수지, 김연경, 김해란. 한국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할 당시 김해란. /연합뉴스

국가대표팀은 김해란에게 남다른 의미다. 그의 가치가 더욱더 빛나는 무대였고 선수로서 잊지 못할 경험도 얻었다. 10년 넘도록 태극마크를 달고 활약하면서 마주한 ‘희로애락(喜怒哀樂)’ 은 그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사실 지금 참 좋은 선수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도 감독님들이 나이가 많은 저를 선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국가대표는 제겐 과분한 자리였다”며 “국가대표로 뛰면서 욕을 참 많이 들었다. (웃음) 그건 관심이기도 하고 팬들이 질책하면 저도 더 노력하기에 좋은 경험이었다고 본다. 인생에서도 좋은 기억이다”고 지난 시절을 회상했다.

김해란이 데뷔했을 때와 현재 여자배구 위상은 많이 달라졌다. 남자배구보다 인기가 더 많은 데다 심지어 방송 시청률도 프로야구를 뛰어넘었다. 2005년 V리그 출범 전부터 활약했던 김해란에겐 이 같은 변화가 놀랍기만 하다. “전과 비교해 인기가 많아졌고 김연경(32ㆍ엑자시바시 비트라) 선수로 더 알려지고 이재영(24), 이다영(24ㆍ이상 흥국생명) 등 좋은 선수가 많다. 팬도 많아졌다. 계속 관심 가져 주셔서 여자배구가 더 좋은 프로스포츠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김해란이 정든 코트를 떠난다. /OSEN

앞으로 흥국생명과 국가대표팀에서 김해란이 떠난 빈자리를 메울 리베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비교 대상에 오른다. 김해란이 후계자가 될 다음 세대에 하고 싶은 말은 ‘인내’다. “저는 늘 후배들에게 버티라는 얘길 많이 했다. 당연히 힘든 날도 있고 도망가고 싶은 날도 많을 거다. 그걸 버티지 못하면 정상에 설 수 없다”며 “꼭 버티라고 얘기하고 싶다. 좋은 날만 있을 수 없다. 그걸 잘 견디면 좋은 날이 온다”고 강조했다.

김해란은 만 36세에 일반인으로 돌아가 새 인생을 시작한다. 당분간 휴식하며 천천히 다음 걸음을 준비할 계획이다. “(은퇴 이후 삶에 대한) 부담감은 아직 없다. 배구를 안 한다고 생각하니까 몸이 너무 편하다”며 “결혼 7년 차에 신혼여행도 못 갔다. 올해 여행을 하려 했는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다. 지도자로 돌아올 마음도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털어놨다.

이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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