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1984년 LA 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리스트 성정아 인터뷰
여자농구 전설 성정아. /본인 제공

[한스경제=박종민 기자] 여자농구는 비인기 종목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한때는 프로야구보다 상한가를 쳤다. 1980년대 여자농구는 남다른 국제대회 성적을 기반으로 큰 인기를 누리며 국내 스포츠에서 처음으로 ‘스카우트 전쟁’이라는 단어를 탄생시켰다.

스카우트 전쟁의 중심에 섰던 선수 중 한 명은 바로 1984년 LA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성정아(55)다. 수원 영생고 예체능부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당시 동방생명, 태평양화학, 신생 현대가 탐내던 선수였다. 이들 팀들은 현금이나 부동산 등 억대가 넘는 조건을 걸며 성정아 스카우트 전쟁을 펼쳤다. 여자농구 최초의 억대 스카우트 전쟁이다. 상황이 과열되자 급기야 체육계에서는 진상조사까지 벌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 모두 ‘농구 선수 출신’

성정아는 최근 본지와 인터뷰에서 그 시절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1980년대에는 여자농구가 프로야구보다 계약금 등 액수가 높았다고 들었다. 억대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건 사실이다”라고 털어놨다.

1980년대 여자농구의 인기는 대단했다고 회상했다. 성정아는 “가끔 옛날 사진을 꺼내어 보면 사진 속 경기장들에는 관중이 꽉 차 있다. 제가 부상에서 재기하는 경기도 중계해줄 정도였다. 요즘 학생들은 남자농구 선수 이름도 잘 모르지만 그땐 중고등학생들이 여자농구 선수들을 보러 경기장에 와 플래카드를 흔들었다. 남학생들한테도 편지를 많이 받았다”고 웃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스포츠를 주목하게 만들어야 했던 시대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1980년 5월 신군부 쿠데타로 들어선 전두환(89) 정권은 이후 '3S 정책'을 추진했다. 3S는 섹스(Sex),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의 머리 글자를 딴 것으로, 이 정책은 독재정권이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활용됐다. 전두환 정권은 정세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당시 야구, 축구, 씨름 등 각종 스포츠의 프로화를 추진했고 그로 인해 스포츠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성정아는 어린 시절 체격 조건이 뛰어나지 못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농구를 시작했다던 그는 “달리기가 빨랐지만, 몸이 너무 마르고 약했다. 외가가 있는 동네의 학교에 농구부가 있어 찾아갔더니 코치님이 ‘이 손목으로 어떻게 농구공을 드냐’는 말까지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키도 또래에 비해 조금 큰 정도였다. 농구는 제가 좋아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키가 그리 크지 않은 상태에서 농구를 시작한 장점도 있었다. 그는 “외곽 플레이부터 시작했다. 가드나 포워드를 맡다가 중학교 3학년 때 키가 훌쩍 크면서 센터가 됐다. 덕분에 폭넓은 농구를 할 수 있었다. 아들인 (이)현중이도 비슷한 장점을 갖고 있다”고 돌아봤다.

성정아(왼쪽)와 아들 이현중. /성정아 제공

현재 성정아의 집안은 이른바 ‘농구 집안’이다. 남편은 고려대와 실업 명문 삼성전자에서 선수로 뛴 이윤환(54) 삼일상고 농구부장이고, 딸 이리나(24) 씨는 16세 이하 여자농구 국가대표 출신으로 지금은 경희대 스포츠의학과에 재학 중이다. 아들 이현중(20)은 미국대학스포츠협회(NCAA) 데이비슨대 농구 선수로 향후 하승진(35)에 이은 한국인 2호 미국프로농구(NBA) 입성을 목표하고 있다.

성정아는 학창 시절에 인터넷이 없었고 TV 보급도 대중화되지는 않았던 터라 롤모델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는 “어릴 때 TV에서 복서 홍수환(70) 씨를 봤던 기억이 있다. 농구는 사실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다. 박신자(79) 선생님과 강현숙(65), 박찬숙(61) 선배 등 잘하는 분들이 계셨지만 누구를 목표로 두고 할 여건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여자프로농구, 세대교체 잘 이뤄져야

성정아는 농구인생에서 세 가지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먼저 LA 올림픽 은메달 획득 순간에 대해선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회에 나갔다. 그땐 승부욕으로 경기를 했는데 돌이켜보면 올림픽이 제 인생의 큰 성취였더라”고 언급했다.

그는 “당시 미국과 구소련 두 팀이 세계 여자농구 최강국들이었다. 한국과 중국, 캐나다 등이 아래 그룹에 있었다”며 “LA 올림픽 예선전에선 중국에 크게 지며 본선 티켓을 따지 못했는데 일부 공산국에서 대회 출전 보이콧을 하면서 자동 출전권이 생겼다”고 얘기했다.

이어 “그때 여자농구에 대한 시선이 부정적이었다. 선수단은 대회 전 짧은 기간이었지만 혹독한 훈련을 소화했다. 근육이 파열됐을 정도로 고된 훈련이었다”며 “한국은 결국 대회에서 중국, 유고, 호주, 캐나다 등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고 미국에는 졌지만 은메달을 따냈다”고 힘주었다.

성정아는 “실업팀 동방생명에서 부상으로 수술하고 입원하기를 반복했다. 재기해서 농구대잔치 MVP를 받은 것,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금메달을 따고 대표팀에서 은퇴한 것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성정아. /본인 제공

저조한 인기의 요즘 여자프로농구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성정아는 “제가 26세 때 은퇴를 했는데 지금은 40세까지도 뛴다. 체력 관리를 잘하는 부분은 존경 받을만하다”고 답했다.

다만 그런 부분이 오히려 여자프로농구의 세대교체를 더디게 만들었다고 역설했다. 성정아는 “일부 선수들이 오래 뛰면서 후배들의 양성이 더뎌졌다. 어린 선수들이 단계를 밟아 나가면서 기회를 받아야 그게 경험이 되는데 나이 든 선수들이 기회를 차지하고 있다. 어린 선수들이 조금 서툴더라도 기회를 많이 받아야 하는데…”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중간에 좌절하고 그만두는 선수들도 많다. 시작부터 큰 희망이 안 보이니 학생들이 굳이 이런 운동을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생각을 가진 학부모님들이 계신다”며 “선수 순환이 잘 안 되고 있다. 그게 안타깝다. 물론 선수들도 비 시즌에는 자기 개발을 위해 열심히 훈련하는 자세를 갖춰야 리그가 발전할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종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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