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31일(한국시각)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3차전에서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시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스경제=박대웅 기자]  "USA. USA!"

2001년 10월31일(한국시각) 뉴욕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간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3차전. 국내 야구팬들에겐 '핵잠수함' 김병현의 등판 여부로 주목 받았던 이날 경기에 특별한 시구자가 투구판을 밟았다. 열렬한 야구광인 아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경호원 대동 없이 홀로 마운드에 섰다. 

9·11 테러 발생 6주 만에 열린 월드시리즈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더구나 시구자는 부시 대통령이다. 저격이나 추가 테러 등 막연한 공포가 감돌았다. 그럼에도 부시 대통령은 경호원 없이 힘껏 투구판을 굴렀고, 그의 손 끝을 떠난 볼은 포수 미트에 꽂혔다.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와 표정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양키스타디움에 전달됐다. 

양키스타디움은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찼다. 관중은 일제히 "USA"를 연호했다. 순간 양키스타디움엔 테러의 공포 대신 극복과 재건의 의지가 뜨겁게 타올랐다. 태평양을 건너 지구 반대편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필자의 팔에도 닭살이 돋아날 만큼 인상적 순간이었다. 스포츠가 집단적 패닉과 막연한 두려움을 이겨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갖게된 결정적 장면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20년 현재. 미국은 다시금 위기에 처했다. 이번엔 테러가 아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전염병과 싸움이다. 전 세계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숨진 사망자 중 3분의 1이 미국에서 나올 만큼 상황은 좋지 않다. 코로나19 확산에 미국은 2001년 그 이상의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 분노와 좌절을 맛보고 있다. 미국인에게 탈출구가 절실하다. 9·11테러 당시 야구와 같은.  

미국인은 KBO리그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KBO는 4일 미국 최대 스포츠 채널 중 하나인 ESPN과 중계권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ESPN은 5일 NC와 삼성의 대구 개막전을 시작으로 미국인들에게 KBO리그를 생중계하고 있다. KBO리그 효과는 놀랍다. 한국 야구를 시청한 국외 팬들은 하나 둘씩 응원 팀 '커밍아웃'을 하고 있다. 

특히 NC 다이노스는 인구 1000만 명에도 메이저리그 연고 구단이 없는 노스캐롤라이나와 영문 약자가 같고, 공룡 화석이 유명한 노스캐롤라이나 지역 특색과 팀 마스코트가 공룡이라는 우연의 일치로 단숨에 미국인이 꼽은 KBO리그 최고 인기구단 반열에 올랐다. 여기에 개그맨 김준현은 대구구장 외야 옥외 피자 광고물 덕분에 '피자가이', '피자맨' 등으로 강제 미국 진출에 성공했다. 또한 메이저리그에선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여겨지는 '빠던'(배트 플립·타격 후 방망이를 던지는 행위)은 KBO리그 만의 특별한 문화로 미국 팬들을 열광케 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비단 야구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원규 K리그 2020시즌 개막을 앞둔 8일 프로축구연맹은 "전날 독일, 호주, 중국 등 17개국에 중계권을 판매한데 이어 개막 당일인 이날까지 19개국이 추가로 K리그 중계권을 구매했다"고 전했다. 이 중 눈길이 가는 건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가 K리그 중계권을 샀다는 점이다.

잉글랜드 공영 BBC는 8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전북 현대와 수원 삼성의 개막전을 생중계에 문자 중계까지 곁들여 생생하게 전했다. '대박이 아빠' 이동국(전북)이 개막전에서 결승골을 넣자 BBC 해설자는 "믿어지는가. 우리가 41살 이동국을 빼면 안된다고 말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동국은 2006년부터 2시즌 동안 잉글랜드 프로축구 클럽 미들즈브러에서 뛰었다. 미들즈브러의 한 팬은 트위터에 '12년 만에 이동국의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고 반가움을 전하기도 했다. 

미국과 잉글랜드를 비롯한 전 세계는 각각 응원하는 종목만 다를 뿐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을 K스포츠로 위로 받고 있다. 마치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던 '국가 부도의 날', 거구의 빅리거를 헛손질로 돌려 세우던 '코리안 특급' 박찬호와 연못에 빠진 볼을 살려 내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한국 여자 골프의 새로운 역사를 썼던 박세리에 열광했던 것처럼. K스포츠가 외국팬들에게 '제2의 박찬호', '제2의 박세리'가 되고 있다.   

박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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