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관. /한국스포츠경제 DB

[한스경제=이정인 기자] ‘느림의 미학’ 유희관(34ㆍ두산 베어스)이 대기록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고 있다. KBO 리그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든 그는 올해도 조용한 ‘마이 웨이’를 걷는 중이다.

유희관은 27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 홈 경기에 선발투수로 나서 7이닝 동안 4피안타 1실점을 기록하며 호투했다. 두산이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32)의 결승타를 앞세워 4-2로 이기면서 시즌 2승째를 거뒀다. 경기 뒤 김태형(53) 두산 감독은 “유희관이 긴 이닝을 책임지며 자기 몫을 완벽하게 해줬다”고 칭찬했다.

유희관은 이날 시속 86~103km의 느린 커브와 시속 120km대의 체인지업과 슬라이더 그리고 최고 시속 131km인 빠른 공을 섞어 SK 타선을 잠재웠다. 또 스트라이크존을 살짝 걸치는 보더라인 피칭으로 타자들을 꼼짝 못 하게 했다. 특유의 완급조절과 정교한 제구력이 빛났다. 경기 뒤 취재진과 만난 유희관은 "팀 연승에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많은 이닝을 투구했고, 느낌이 좋았다"며 "다음 경기에서도 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 같아 기쁘다"고 미소 지었다.

유희관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이닝 소화다. 첫 등판인 8일 잠실 KT 위즈전에선 4이닝에 그쳤지만, 15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에서 5이닝, 21일 잠실 NC 다이노스전서 6이닝을 소화했다. 이날은 올 시즌 개인 최다 이닝과 투구 수(110개)를 마크했다. 2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선발 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투구)를 기록한 그는 "살도 많이 뺐고, 몸 상태가 좋다. 5일에 한 번 등판하는 것이니 이닝에 욕심이 있다"며 "시즌 초반이지만 불펜 투수들이 지친 상태다. 결과가 좋지 않아 힘들어한다. 많은 이닝을 던져 체력을 아껴주고 싶다"며 두산의 ‘투수 조장’다운 책임감을 보였다.

이날 경기는 미국 스포츠 전문 채널 ESPN이 생중계했다. ESPN은 메이저리그(MLB)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중단되면서 KBO 리그를 중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ESPN은 유희관이 선발 등판한 4경기 중 3경기를 팬들에게 보여줬다. 유희관의 투구가 처음으로 ESPN의 전파를 탄 건 15일 KIA전이다. 당시 ESPN 중계진은 “체인지업을 계속 던지고 있다. 속구는 언제 던질지 궁금하다”고 반응했다. 두 번째 경기는 21일 NC전이다. 이 경기에서 유희관은 3회 박민우(27) 상대 시속 77㎞짜리 슬로커브를 선보였다. ESPN 중계진은 “이 정도 구속이면 메이저리그(ML)에서도 최저 구속일 것”이라고 신선하다는 반응을 비쳤다. 유희관은 "제가 던질 때마다 ESPN 중계가 걸린다. 지난 번처럼 더 느린 공을 던질까 생각도 했지만 여유가 없었다. 점수 차가 벌어졌으면 던질까 했다. 접전 상황에서는 공 1개로 흐름이 바뀔 수 있어 안 던졌다. 미국에서 이슈를 위해 야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에 KBO 리그를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빠던' 등이 너무 이슈화되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 너무 치우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메이저리그는 거기만의 재미가 있고 우리 야구는 또 우리만의 재미가 있다”고 소신을 밝혔다.

두산 유희관. /OSEN

유희관의 야구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도전’이다. 프로 데뷔 이후 늘 ‘느린 공을 던지는 투수는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과 싸워왔다. 유희관은 “느린 공으로도 잘 던질 수 있다는 것을 미국 팬들에게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힘줘 말했다.

느린 구속 때문에 리그에서 가장 과소평가됐지만, 유희관은 매년 꾸준한 성적을 올리며 편견을 철저히 깨부쉈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올렸다. 올해 8승을 더하면 8년 연속 10승 달성이라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KBO 리그 역사에서 단 9명(송진우ㆍ이강철ㆍ정민철ㆍ김광현ㆍ김상진ㆍ양현종ㆍ윤성환ㆍ장원준ㆍ차우찬)만 거머쥔 대기록이다. 유희관은 "느린 공이라는 편견을 늘 안고 있지만, 목표 의식은 뚜렷하다. 8년 연속 10승을 거두면 영광일 것 같다”고 말했다.

두산 역대 좌완 최다승 투수인 유희관은 KBO 리그에서 성공한 투수를 가르는 바로미터인 통산 100승 달성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는 “100승까지 11승이 남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열심히 하면 기록은 따라올 것이다. 의식하면 역효과가 난다. 공이 느리듯이 천천히 저의 길을 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이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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