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익명성 강한 온라인 범죄……민간에만 맡기는 것은 위험해
법제화 통한 잠입 수사 정당성 확보 우선…"성평등한 문화 조성이 함께 이뤄져야"
성범죄 관련 전문가들은 수사팀 확장과 함께 디지털 전환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수사기법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래픽=이석인 기자

[한스경제=마재완 기자] 지난 3월 ‘박사’ 조주빈(25)이 긴급 체포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판사 이현우)는 6월 11일 1차 공판을 열었다. 조씨는 아청법 위반, 협박 등 무려 14개의 혐의를 받아 기소된 상태다. 지난 22일에는 범죄단체조직 혐의로 추가 기소되며 15개로 늘었다.

그러나 조씨가 피해자에 대한 강요나 협박 등 일부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향후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우리 사회 속 디지털 성범죄를 발본색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편집자 주>

성범죄 관련 전문가들은 수사팀 확장과 함께 디지털 전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수사 기법 도입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이정연 여성가족부 아동청소년성보호과장은 “익명성과 폐쇄성을 활용하는 디지털 성범죄 특성상 위장 수사(잠입 수사)는 필수다”라며 “디지털 성범죄는 유포가 쉽기 때문에 연쇄 고리를 처음부터 끊어내기 위한 특수 수사기법 도입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사건 발생 이후 피해자 보호 등 사후 관리도 중요하지만 잠입 수사 등을 통한 근본적 문제 해결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n번방 사건은 대학생으로 구성된 ‘추적단 불꽃’이 n번방에 잠입, 끈질긴 추적 끝에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다. 그러나 민간이 주도하는 잠입 수사는 위험도가 높고 상대적으로 전문성 보장도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이에 지난 4월 정부는 국무조정실 주관 관계부처 합동회의에서 ‘디지털 성범죄 근절대책’을 심의·확정하며 기회 제공형 잠입 수사(위장 수사)도입을 위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에서 현재 시행중인 위장 수사는 범의 유발형, 기회 제공형 등으로 분류된다. 주로 마약 사범 검거에 자주 사용되는데 기존 판례상 자칫 위법 행위로 오해받을 수 있어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 네덜란드 등은 이미 디지털 성범죄, 특히 미성년자 대상 성 착취 영상 제작·유포 범죄 수사를 위해 위장 수사를 폭넓게 활용하고 있는 만큼 한국도 잠입 수사 제도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특히 지난 2018년 미국 국토안부수사국이 다크웹에서 아동 성 착취물 동영상을 배포한 한국인 손정우(24)를 위장 수사로 검거해 그 효과도 입증된 상태다.

손씨는 추적이 어려운 다크웹에 ‘웰컴투비디오’라는 사이트를 개설하고 아동 성 착취물 동영상 약 25만개를 배포해 검거됐다. 그러나 한국에서 1년6개월의 형량을 마치고 출소하기 직전 재구속 됐다. 미국 법무부가 범죄인 인도 절차에 따라 손씨에 대해 미국 송환 요청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 손씨 송환은 내달 6일까지 연기된 상태다.

또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여정원)이 15일 발표한 '21대 국회, 국민이 바라는 성평등 입법과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디지털 성범죄 처벌과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에 대해 응답자 94.5%(여성 98.4%, 남성 90.7%)가 동의해 디지털 성범죄 관련법 제정에 대한 국민 열망도 큰 상황이다.

지난 19일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각계 전문가를 초청해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우한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권인숙 의원실 제공

정치권,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 처벌 입법 논의

정치권에서도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 처벌을 위한 입법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지난 19일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동료 의원과 민간 전문가, 경찰 관계자를 초청해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한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에 대한 처벌법 마련이 논의됐다. 특히 잠입 수사 입법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구체적인 입법 방향성까지 가닥이 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최종상 경찰청 사이버수사과장은 “전통적 성 착취물 유통 경로와 달리 익명성이 강한 온라인 메신저 등은 범죄가 아주 은밀하게 진행돼 탐지에 어려움이 있다”라고 말해 잠입 수사 법제화가 디지털 성범죄 근절에 고무적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입법이 추진돼 본격적인 잠입 수사가 이뤄지면 예비 범죄자들의 범행 의지가 원천 봉쇄되고 이어지는 범죄 발생 예방이 가능하다. 더불어 범죄 초기부터 수사 기관이 개입해 증거 확보가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다. 

다만 위장 수사 진행 시 범죄를 저지를 생각이 없던 사람에게 수사 기관이 접근해 범행을 유발토록 만드는 경우에 대해서는 형사소송법 제302조2항(위법수집증거의 배제)에 어긋나 위법성을 가진다고 보는 판례도 존재한다. 따라서 법 제정 시 해당 부분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제도 보완이 필요하며 수사 기관 실무진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도 함께 마련돼야 하는 상황이다.

경찰 내부 관계자는 “만약 잠입 수사가 법제화되면 디지털 성폭력은 물론 다양한 사이버 범죄에 대한 수사 진척도가 매우 높아질 것”이라며 “상당히 긍정적인 움직임이긴 하지만 법 제정이 선행돼야 수사 실무진도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도 성 구매자로 위장해 채팅 앱에 접속한 뒤 판매자와 접촉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는 등 잠입 수사와 유사한 방법으로 수사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긴 있다”라며 “다만 이러한 잠입 수사가 법으로 제정돼 시행되면 일선 수사 기관도 보다 안전하게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8년 카메라 등을 이용한 디지털 성범죄는 약 5년간 91.2%나 증가했다. /대검찰청 제공

공범 되지 않는 것 가장 중요해

전문가들은 수사 기관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에 만연한 성 불평등 문화와, 성 착취 영상 등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으면 제2의 조주빈이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김효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조주빈 사건으로 불거진 디지털 성범죄는 단순히 텔레그램이라는 IT 플랫폼 때문에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여성을 대상화하고 소비하는 문화가 변하지 않으면 또 다른 박사방은 언제든지 만들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잠입 수사처럼 특정 유통 경로를 겨냥한 수사 기법은 한 명의 피해자라도 더 줄일 수 있다면 도입하는 게 당연하다”라며 “다만 강남역 사건 등 성범죄는 이전부터 우리 주변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일을 계기로 사회 전반에 걸친 성 불평등 요소를 제거해나가는 원년으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정원이 지난달 15일 발간한 '디지털 성범죄 관련 법·제도 현황과 개선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검찰에 접수된 피의자 4948명 중 15.7%가 불법 성범죄 영상 유포와 재유포 피해를 입었다. 

피의자 신분은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율이 62.6%를 기록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연인, 직장동료 및 친구, 전 배우자 혹은 전 연인 이라고 응답한 비율도 약 15%에 달해 면식이 있는 관계라고 해도 디지털 성범죄로부터 안심할 수 없는 모양새다.

한편 서울중앙지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 태스크포스(TF)는 지난 22일 조주빈과 강훈 등 핵심 피의자 8명을 범죄집단 조직·활동·활동죄 등으로 추가 기소했다. 이들이 박사방을 통해 단순한 음란물 공유를 넘어 후원금 이용, 이익 배분이라는 경제적 이익을 매개로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 죄질이 나쁘다는 이유다.

검찰은 박사방에 대해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비대면성을 악용해 반사회적 인격체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거나 집단적 공격 성향에 쉽게 동조하는 단체 형태"라며 "핵심 조직원의 행태가 인격살해 수준의 범행을 일종의 유희로 여길 정도로 집단적 폭력성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현재 박사방 소유 가상화폐 전자지갑 15개, 예금과 주식 등은 몰수보전된 상태다. 압수된 현금 1억3000만원도 추징보전됐다. 검찰은 향후 조씨 등 핵심 피의자 8명 외 나머지 조직원 30명에 대해서도 범죄단체조직죄를 의율해 수사를 이어 나간다.

마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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