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와 예능코드로 구성된 이천 서브포럼 홍보 영상에 직접 출연한 SK그룹 최태원 회장. 사진=연합뉴스

[한스경제=송진현 기자]  한국의 재벌 총수들은 일반인들에게는 물론 언론계 종사자들에게도 접근조차 하기 쉽지 않은 존재다.

필자가 30년 넘게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지근거리에서 재벌 총수를 만난 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한 사람뿐이다. 지난 2004년 8월 아테네 올림픽 취재차 현지에 머무르는 동안 IOC 위원이던 이건희 회장이 한국 취재진 부스를 찾아와 기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난생 처음 이건희 회장을 바로 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 회장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예의 재벌 총수답게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기회말고는 취재 명목으로라도 재벌 총수에 대한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내로라하는 총수들은 가끔 TV 뉴스로만 지켜봤을 뿐 필자에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남아있다

재벌 기업 종사자들을 만나 총수에 대한 얘기를 들어봐도 그야말로 샐러리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였다. 한국 근대산업의 태동기인 1960~70년대와 고도 성장기인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이를 맨 앞에서 진두지휘한 재벌 총수들은 부와 파워, 권위의 상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업 1세대로부터 2~3세대로 세대교체가 이뤄져 오면서도 총수들의 이미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근엄한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재계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기 일쑤였다.

이런 흐름에 비춰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최근 ‘B급 개그’ 홍보 동영상은 국민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만한 ‘사건’이다. 그동안 워낙 허심탄회하게 직원들과 소통을 해왔던 최회장이지만 이번 ‘개그 버전’은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SK그룹은 오는 8월 이천포럼을 개최한다. 그룹 CEO와 임원들을 상대로 세계 경제와 산업, 기술, 과학, 지정학 분야의 국내외 전문가를 초청해 이뤄지는 강연과 토론자리다. 세계 경제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 따라가야만 기업이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 최 회장의 지론이다. 그는 이를 위해 몇 년전부터 임직원들에게 일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딥 체인지)를 주문하고 있기도 하다.

SK이천 포럼 개최를 앞두고 최 회장은 지난 5월부터 임직원들의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이천 서브포럼을 잇따라 개최하고 있다. 이 서브포럼의 홍보를 위해 최 회장이 홍보 동영상에 3차례 직접 출연한 것이다.

‘최태원 클라쓰’로 명명된 홍보 동영상 1편에 따르면 이천포럼의 홍보 아이디어 회의 중 갑자기 나타난 최회장은 “직접 유튜브를 통해 홍보하겠다”고 말했고 순간 그의 머리 위에 말풍선으로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거지?”라는 자막이 뜬다. 2편에선 “40초 안에 사회적 가치(SV Account)를 몸으로 설명하라”는 미션을 받은 최 회장이 답을 찾지 못하다가 옷을 벗으려고 하자 몸에 ‘19금’이라는 빨간 자막이 뜬다. 3편에선 ‘일(하는) 방(식) 혁(신)’으로 삼행시를 지어보려던 최회장이 ‘일’이라고 혼잣말을 하는데 옆 자리 사람이 숫자 게임인줄 알고 ‘2!,3!”하고 외치며 벌떡 일어선다.

재벌 총수라는 권위를 던져버리고 유머스런 동영상에까지 출연한 최태원 회장의 리더십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재벌 총수하면 으레 일반인보다 총명하고 뭔가 남다른 점이 있을 것 같은 기존 이미지에서 과감히 탈피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최 회장이 자신도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시그널을 보내며 직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 시도로 해석했다. 자신의 권위만을 앞세워 일사분란하게 직원들을 움직이는 수직적 리더십으로는 현재와 같은 산업 생태계에선 쉽게 미래를 개척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진단했다. 수평적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총수를 정점으로 하는 상명하복식 리더십으로는 4차 산업의 험한 파고를 헤쳐나갈 수 없다는 것이 경영학자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인공지능 등 IT산업의 발전을 토대로 융복합이 이뤄지는 4차산업 시대에는 과거와 같이 정해진 룰과 규칙에 따라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기업의 생존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직원들의 창의력이 중요해진 시대다.

이 같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최 회장이 ‘개그 동영상’에까지 출연함으로써 혁신적 변화의 한 단면을 직접 보여줬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말만 앞세우면 직원들의 감동이 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벌 3세 경영인 중 가장 모범적인 길을 걷고 있는 최태원 회장의 ‘리더십 2.0’이 타 대기업으로도 확산되길 기대해 본다. <한스경제 발행인>

송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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