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양지원 기자] 데뷔 42년 차 배우지만 특정 수식어로 그를 정의하기 힘들다. 흔히 국내에서 오랜 연기활동을 한 여성 배우라면 ‘국민 엄마’라는 타이틀이 붙기 십상이지만 예수정은 예외다. 자신의 삶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지닌 작품을 좇는 예수정. 스크린 주연작으로 들고 온 ‘69세’(20일 개봉)는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노년 여성이 스스로 삶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예수정은 극 중 29세 남성 간호조무사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69세 효정으로 분했다. 단순히 주인공을 ‘불쌍한 피해자’로 규정 짓지 않는 이 영화에서 예수정은 끝없는 사회의 편견과 무례함 속에서도 주체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는 효정은 ‘진짜 어른’에 가깝다. 노인 여성에 대한 편견과 인권을 말하는 ‘69세’ 속 예수정은 시종일관 단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노년 여성의 인권과 편견을 다룬 영화인데 어떤 점이 가장 끌려 출연하게 됐나.

“사실 소재 자체가 관심을 끌었던 건 아니다. 소재는 오히려 픽션이면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임선애 감독을 만나 물어보니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이런 사건은 ‘말을 한들 누가 믿으랴’라는 취약성 때문에 일어난다고 들었다. ‘아, (노년 여성은) 정말 소수 약자구나’라고 생각했다. 소수 약자에 대한 이야기가 실화 기반이라 그런지 과장 없이 잘 그려져 있었다. 당한 자의 이야기보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사회의 시선들이 기가 막혔다. 작품이 사회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구성 하나하나 지지부진한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는 점 역시 마음에 들었다.”

-특정 인물을 기반으로 한 영화는 아니지만 피해자를 대변하는 입장을 연기했다. 조심스럽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나.

“부담은 없었다. 장르가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상황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었다. 69세 노인이 20대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69세 여성? 돈 벌기도 힘들고 소수 약자에 가깝다. 그런 소수 약자에게 가장 무례한 짓을 저지른 상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봤다.”

-효정이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사는 여성으로 결말이 바뀌었는데 효정 캐릭터에 대한 변화도 있었나.

“크게 바뀔 건 없었다. 이미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아무래도 신고해야 할 것 같아요’라고 하지 않나. 신세를 지고 있고, 친구로서 애정이 있는 남자에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상당히 주체적이라고 생각했다. 효정과 동인은 같이 살지만, 각 방을 쓴다. 쇼핑도 각자 한다. 집에 얹혀 사는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늘 있어서 책방에 가서 먼지를 털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구석구석 개체적인 삶이 잘 쓰여 있었다.”

-효정은 겉으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분노했다. 그런데 69년을 살아오면서 이 사회의 무례함을 얼마나 당해왔겠나. 보호받는 위치에서 여기까지 자기 삶을 묵묵하게 견뎌온 삶이라면 상당히 많이 삼켰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노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당해왔고, 숨을 죽여 살아온 거다. 자기 자신도 어떤 의미에서는 죄의식을 느꼈을 것 같다. (효정의) 가정이 나오지 않지 않나. 딸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도 않는다. 과거가 안 나오지만, 안 나오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생각할 수 있다. 부모 입장에서 자식들에게 죄스러운 게 있을 거다. 그래서 늘 한 쪽 어깨가 내려가고 사회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숨어들려고 하는 면도 있을 거다.”

-효정은 ‘노인 같지 않다’ ‘아가씨 같다’ 등 수많은 편견, 시선과 마주한다. 이런 사회적 시선에 공감이 됐나.

“알아서 욕먹지 않으려고 소박하게 입고 다닌다. 작품에서 의미하는 건 무시 받지 않으려는 거다. 나 역시 그런 적은 있다. 병원이나 미용실을 갈 때 높은 구두를 신기도 했다. 자동차도 그렇다. 제일 먼저 통과해야 하는 것이 주차장인데, 차종에 따라 다르다. 이 사회에 이상한 면이 많지만 이제는 없어지리라고 본다. 우리가 한가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한가할 때는 비판할 게 많다. 일 때문이 아니라 자기 삶의 본질에 다가가 스스로 바쁠 때는 자기 삶에 집중하느라 남이 무엇을 하든, 80세 노인이 원피스를 입고 해운대 비치를 걷고 있든 말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런 여러 의미의 편견에 대한 것을 이 영화가 잘 꼬집어낸 것 같다.”

-절절한 모성애부터 세고 강렬한 캐릭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잘 소화하진 않고 노력한다. 배우의 숙제인 것 같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들도 많이 있을 텐데, 나는 나 자신이 천의 얼굴을 갖고 있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작품을 잘 읽어내고 작품에서 그 역할이 가는 방향을 세심하게 짚어내서 가야하는 입장이다. 배우보다 작품을 보러 오지 않나. 그것에 위안을 얻는다.”

-데뷔 42년 차 배우다. 배우란 삶의 어떤 의미인가.

“배우가 참 좋은 직업이다. 역할을 맡을 때마다 그 역할에서 배우는 게 있다. 최근 공연한 연극 ‘화전가’를 예를 들어보더라도, 50년대 시대의 인물인데 침묵할 때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워낙 ‘버럭 형’이기 때문에, 침묵할 때 침묵하되 결정적으로 능동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는 누가 뭐라 해도 60년 이상 침묵해온 무게만큼 용단을 내려 결단하는 부분에서 많은 걸 배웠다. 스스로 무명임을 자체하고 무명의 길을 걷고, 스스로 행복해하는 자의 힘이라면 힘일까. 훨씬 자유로울 수 있다. ”

-어떤 ‘어른’으로 살고자 하나.

“대단한 거 없다. 그저 덜 주책 부리면서 덜 피해주려고 한다. 유기체적으로 힘이 없어졌을 때는 큰 존재, 관대함 속에서 하루속히 소멸되기를 원할 뿐이다.”

사진=엣나인필름 제공 

양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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