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경제=양지원 기자] 영화에 등장하는 모두가 ‘도망친’ 여자다. '도망친 여자'는 자신을 억압하는 남자, 혹은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따라간다.
‘도망친 여자’는 결혼 후 한 번도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던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두 번의 약속된 만남,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과거 세 명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 감희(김민희)를 따라가는 영화다. 연인 관계인 홍상수 감독과 김민희의 일곱 번째 작품이다.
감희는 단 한 번도 남편과 떨어져 지낸 적이 없다.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붙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감희 역시 그의 말대로 살았다. 감희는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감희의 며칠 안 되는 ‘자유’ 시간을 비추는 이 영화 속에 특별한 사건은 없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스타일이기도 한데 이번 영화에서는 서사가 더 단촐해진 느낌이다. 단축된 서사 대신 인물들의 감정은 한 층 더 증폭돼 또 다른 재미를 준다.
감희가 외출 첫 날 만난 인물은 영순(서영화)이다. 긴 머리를 고수하던 감희는 ‘답답해서’ 머리를 잘랐다며 짧은 단발머리로 나타난다. 영순은 감희에게 “정신 나간 고등학생 같다”라며 농을 친다. 감희는 남편과 헤어지고 독립해 룸메이트와 살고 있다. 전보다 훨씬 더 평화로워 보이는 영순. 감희는 영순에게 “남편과 결혼 후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 남편은 사랑하면 무조건 붙어있어야 한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영순은 자유로운 시간은 필요하다고 한다.
영순과 시간을 보낸 후 감희는 수영(송선미)을 만난다. 수영 역시 솔로인 인물로 최근 이사를 마치고 새 집에서 살고 있다. 수영은 젊은 남성으로부터 뜨거운 구애를 받고 있는데 이를 피곤해한다.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진 수영을 보며 감희는 부러워한다.
감희는 이후 독립영화관을 찾는다. 그 곳에서 연락을 끊고 지낸 친구 우진(김새벽)을 만나는데 우진은 감희에게 대뜸 사과하고 싶다고 한다. 우진은 감희의 전 남자친구인 정선생(권해효)과 결혼해 살고 있다. 감희와 우진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두 사람 사이에는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
감희는 오랜만에 정선생을 우연히 마주친다. 정선생은 북콘서트를 열 만큼 인기 작가가 됐다. 매일 인터뷰를 하면서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정선생의 모습에 우진은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 감희 역시 “똑같은 말만 계속 하다보면 다 날라갈 것 같다”라고 정선생을 쏘아붙인다. 그런 감희에게 정선생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왜 왔냐”고 되묻는다.
‘도망친 여자’에는 홍상수 감독만의 다양한 은유가 등장한다. 실제로 자신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홍상수 감독은 ‘도망친 여자’에서도 이를 대입했다. “똑같은 말만 반복하며 사는 삶” “똑같은 말만 반복하다 보면 다 날아갈 것 같다” 등의 대사가 그렇다. 자신의 삶을 가식적으로 포장하거나 작위적으로 설명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영화 속 감희는 굉장히 잘 먹는 인물로 표현된다. 이는 곧 먹어도 먹어도 허전하고 공허함을 느끼는 감희의 상태를 말해준다. 현재의 삶을 벗어나 도망치고 싶어하는 그의 심경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과일인 사과 역시 두 차례 등장해 의미를 해석하게 한다. 실제로 사과는 불화의 사과라는 상징성을 띠고 있기도 하다. 감희와 주변 인물들이 사과를 함께 먹으면서 더 돈독해지는 관계를 보여준다.
홍상수 감독의 여느 영화들처럼 ‘도망친 여자’들에서 언급되는 남자들은 지질하다. 특히 자신의 전 연인인 감희를 만난 후 끝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정선생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낸다. 홍 감독 특유의 줌인, 줌아웃 연출법 역시 여전하다. 또 인물들 간의 관계성과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유추해 보는 것도 이 영화만의 재미일 수 있겠다.
러닝타임 77분. 9월 17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사진=영화제작전원사 제공
양지원 기자 jwon04@sporbiz.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