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美서 자금세탁방지법 위반으로 1천억 벌금 합의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 의도적으로 이행하지 않아"
준법감시인 제안·요청 수차례 거절
기업은행이 지난 4월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미국 사법당국에 8600만 달러(약 987억원) 규모의 벌금에 합의했다. /IBK기업은행 

[한스경제=이성노 기자] 최근 국회에서 자금세탁방지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들려오는 가운데, 미국에서 준법감시인의 의견을 묵살한 끝에 거액의 제재금을 부과받은 기업은행이 당시 허수아비 준법감시인을 배치했던 게 아니었냐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정무위 소속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업은행이 미국에서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1000억원의 벌금을 부과받은 가운데, 국내 시중은행이 자금세탁방지에 여전히 경각심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홍 의원은 “세계적으로 자금세탁방지 영역이 비금융권까지 확대되는 추세인데, 가장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할 금융기관이 여전히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기업은행은 안일한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으로 국회 지적의 발단이 됐다. 

지난 4월 바다 건너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기업은행이 자금세탁방지법 위반 혐의로 미국 사법당국에 8600만 달러(약 987억원) 규모의 벌금에 합의했다 것이었다.

뉴욕지점의 자금세탁방지(AML·Anti Money Laundering) 프로그램을 개선해야 한다는 준법감시인의 지속적인 건의에도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고, 한 무역업체의 이란 제재위반 사건과 관련한 위장 거래를 적시에 적발하지 못하며 거액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기업은행의 벌금 규모는 역대급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03년 당시 외환은행(현 하나은행)은 뉴욕 브로드웨이 지점에서 혐의거래에 대한 보고가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110만 달러(약 12억6000만원)의 벌금을 부과받았고, 지난 2017년 NH농협은행은 미국 뉴욕 금융감독청(DFS)으로부터 자금세탁 방지 내부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1100만 달러(약126억원)의 과징금을 받은 바 있다. 

기업은행과 미국 뉴욕 남부지검 간 합의서에 기업은행과 은행 뉴욕지점이 2011∼2014년 뉴욕지점에 적절한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는 것을 '의도적으로'(willfully) 이행하지 않아 미국 법을 위반했다고 적시됐다. 뉴욕지점내 준법감시인의 지속적인 요청과 경고에도 기업은행이 적절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자원과 인력을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기업은행 뉴욕지점의 준법감시인은 미국인 1명이었고, 2010년초 내부 제안서를 통해 지점 경영진에게 '수동 프로그램으로는 적시에 자금세탁방지를 위한 모든 거래를 다루기 어렵다'고 알렸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후 2010년 5월 뉴욕 지점장에게, 2011년 1월에는 본사 경영진이 포함된 준법감시위원회에 같은 내용으로 문제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력 보강도 꾸준히 요청했으나 영어를 못하고, 준법 감시 경험이 없는 인턴을 제안하는 가하면,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정보기술(IT)팀 직원을 투입하는 데 그쳤다. 

기업은행과 은행 뉴욕지점이 2011∼2014년 뉴욕지점에 적절한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을 마련해 운영하는 것을 '의도적으로'(willfully) 이행하지 않아 미국 법을 위반했다는 내용이 담긴 기업은행-미국 검찰 합의서. /연합뉴스

업계 안팎에서는 기업은행 준법감시인 영향력에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기업내 영향력이 큰 준법감시인의 제안과 요청을 간과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 해도 일반적으로 기업내 준법감시인의 영향력은 절대적"며 "준법감시인의 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관계자 역시 "자금세탁방지 시스템 초창기에 있었던 사건이지만, 준법감시인 역할이 작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현재는 인공지능(AI)을 통한 준법감시 체제도 확산되는 등 국내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은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스경제는 해당 사안에 대해 기업은행에 문의했으나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했다. 

기업은행은 돈을 잃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기 시작했다. 과거 뉴욕지점의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이 미국 법령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 점을 수용해 자금세탁방지 시스템 개선, 인력 충원 등의 조치를 취했다. 

기업은행에 따르면 현재는 효과적인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을 갖췄으며, 뉴욕주금융청은 기업은행과 체결한 동의명령서에서 뉴욕지점의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이 2019년 현재 적절한 상태에 있다고 평가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기관으로서 관련 법령 준수는 물론 국내외 관계 당국과 지속적으로 협의해 자금세탁방지 등 컴플라이언스 시스템을 더욱 효과적으로 개선,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은행권은 자금세탁방지 강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외지점에 현지 법규를 반영한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새롭게 도입하는 한편, 인공지능(AI) 등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이상거래 탐지와 제어 프로세스를 강화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글로벌 금융환경 변화 및 새로운 유형의 자금세탁 위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국내 최고 수준의 글로벌 통합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구축했다.

지난해 글로벌 컨설팅사인 PwC를 통해 해외지점 컨설팅을 완료한 후, 글로벌 자금세탁방지전문 솔루션 제공업체인 SAS를 선정해 해외 9개 지역 지점을 대상으로 새로운 자금세탁방지 시스템을 도입했다. 지난달 7일 싱가폴, 시드니 지점 오픈을 시작으로 14일에 동경·런던·홍콩·두바이·바레인·다카 지점과 인도지역본부(첸나이·구르가온·뭄바이지점)에 시스템 도입을 완료했다.

아울러 인공지능을 활용한 제재법규 심사시스템을 시중은행 최초로 자체 구축하고, 이를 수출입 선적서류 심사업무에 도입했다. 

신한은행은 자금세탁방지 업무에 AI(머신러닝), RPA 등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는 ‘자금세탁방지 고도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농협은행은 자금세탁방지 담당 인원을 대폭 증원하고 경력이 풍부한 인력을 채용했다. 또 새로운 거래모니터일 시스템을 도입했고, 외부 전문 컨설팅을 통해 자금세탁방지 프로그램 운영수준을 업그레이드 했다. 
 

이성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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