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 25일 삼성서울병원서 타계… 향년 78세
2014년 자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6년5개월 만
홍라희 여사·이재용 부회장 등 임종 지켜
1987년 취임 이후 1993년 '신경영 선언' 등 세계 초일류기업 기틀 닦아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삼성전자 제공

[한스경제=김준희 기자] ‘한국 재계의 거목’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서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지난 2014년 5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6년5개월 만이다. 이 회장은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이날 이 회장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지하 2층에 마련됐으며 장례는 4일간 ‘가족장’으로 치러질 계획이다. 발인 예정일은 오는 28일이다.

이 회장은 지난 2014년 5월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투병 생활을 이어왔다. 당초 가장 가까운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심폐소생술(CPR)까지 진행됐고 이후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막힌 심혈관을 넓히는 심장 스탠트 시술을 받았다.

시술이 끝난 뒤 중환자실에서 저체온 치료와 진정 치료를 이어온 이 회장은 심폐기능이 정상을 되찾으면서 일반 병실로 옮겼다. 입원 보름 만에 혼수상태에서 회복했으며 6개월 무렵부터 안정적인 상태로 재활치료를 받았다. 최근까지 자가호흡을 하며 지낸 것으로 알려졌으나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부인 홍라희 여사와 이재용 부회장 등 가족들은 전날 이 회장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 함께 고인의 임종을 지켜본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국내 경제 주요 단체인 전경련과 경총 등도 고인의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전경련은 이날 논평을 통해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재계 최고의 리더였다"며 깊은 애도를 표했다.

전경련은 "남다른 집념과 혁신 정신으로 반도체 산업을 한국의 대표 먹거리 산업으로 이끌었고,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석권했다"며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국격을 크게 높였고 사회 곳곳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며 상생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는 등 고인의 손길은 경제계에만 머물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고인의 혁신 정신은 우리 기업인의 가슴속에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이라며 "고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경제가 처한 위기를 경제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경총도 공식 논평을 내고 "경영계는 불굴의 도전 정신과 강한 리더십으로 우리나라 산업 발전을 견인했던 재계의 큰 별,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 소식에 존경심을 담아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경총은 삼성전자 40년사 발간사에 실렸던 "산업의 주권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도전을 멈춰 서는 안 된다"는 고인의 발언을 언급하며 "생전에 기술 발전에 대한 열정이 높았던 이 회장은 흑백 TV를 만드는 아시아의 작은 기업 삼성을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을 선도하는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고 평가했다.

경총은 "경영계는 반세기를 지나 100년 기업을 향해 도약하는 삼성에 '끊임없는'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는 한편, 위기마다 도전정신과 강한 리더십으로 한국 경제의 지향점을 제시해 줬던 고인의 기업가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의 경제 위기 극복과 경제 활력 회복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취임 이후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힘썼다. 그 변화의 기점이 1993년 ‘신경영 선언’이다. 신경영 철학의 핵심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자기 반성을 통해 변화 의지를 갖고, 질 위주 경영을 실천해 최고의 품질과 최상의 경쟁력을 갖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세계 초일류기업이 되자‘는 것이었다.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연합뉴스

이는 삼성의 경영이념인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해 인류사회의 발전에 공헌한다‘에도 나타나있다.

이 회장은 인재 확보와 양성을 기업경영의 가장 중요한 과업으로 인식하고 학력과 성별, 직종에 따른 인사 차별을 타파하는 열린 인사를 지시했다. 또 삼성 임직원들이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물을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지역 전문가, 글로벌 경영석사(MBA) 제도를 도입했다.

인재 육성과 함께 이 회장은 기술을 경쟁력의 핵심으로 여겼다. 기술인력을 중용해 기업과 사회의 기술적 저변을 확대하는 한편 사업에서는 반도체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판단하고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했다.

이 회장의 신념 아래 삼성은 1984년 64메가 D램을 개발한 뒤 1992년 이후 20년간 D램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지속달성했다. 2018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44.3%를 기록했다.

이같은 노력을 통해 삼성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9년 금융위기 속에서도 성장을 거듭했다. 올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623억달러로 글로벌 5위를 차지했고 스마트폰과 TV, 메모리반도체 등 20개 품목에서 월드베스트 상품을 기록하는 등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했다. 이 회장 취임 당시인 1987년과 비교하면 시가총액 1조원에서 2012년 기준 390조원으로 40배가량 성장하며 총자산 500조원의 외형이 완성됐다.

이 회장은 사회공헌활동과 스포츠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94년 삼성사회봉사단을 출범시킨 이 회장은 사회공헌활동을 경영의 한 축으로 삼고 이를 조직적으로 전개시켰다. 특히 기업으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첨단장비를 갖춘 긴급재난 구조대를 조직하고 국내외 재난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또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꾸준히 스포츠 외교 활동을 펼쳐 2011년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평창이 아시아 최초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는 데에도 기여했다.

이 회장은 재계의 ’큰 별‘로 불리며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지만 그만큼 각종 수사 등 구설수에 오르며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2007년 삼성그룹의 전직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이른바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지면서 특검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이 회장은 특검팀에 의해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됐고 결국 삼성은 2008년 수뇌부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 차명계좌 실명 전환 등의 내용을 담은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재계·체육계 건의로 단독사면된 이 회장은 2010년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이후 조직 재정비와 더불어 휴대전화·반도체·디스플레이 사업 부문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등 현재 글로벌 기업으로서 삼성의 기틀을 닦았다. 특히 이 시기 스마트폰 분야에서 독점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했던 애플을 따라잡는 데에는 이 회장의 집념이 큰 역할을 했다.

이 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을 비롯해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이 있다.

김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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