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정진영] 어느 날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택시기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침 그 현장을 지나던 10대 소년 현우(강하늘)는 도주하는 용의자와 마주친다. 하지만 학교도 다니지 않는 동네 양아치 현우의 말을 경찰은 있는 그대로 들어 주지 않는다. 형사는 폭행 등 강압수사 끝에 현우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고, 미래를 설계해야 할 10대 중반~20대 중반을 현우는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재심’은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현우와 변호사 생활의 위기에 내몰린 준영(정우)이 만나 의기투합, 함께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의 재심을 청구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실제 2000년 8월 익산시 약촌오거리에서 일어난 택시기사 피살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현우의 모델이 된 최 모씨는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 지난해 11월 17일 광주고법 제1형사부로부터 무죄를 선고 받았다.

영화는 뚜렷한 결말이 없다. 범죄가 아닌 재심에 초점을 맞춘 만큼 스릴러보다 휴먼 드라마에 가깝다. 실제 편집 과정에서 현우와 준영이 범인 찾기에 골몰했던 부분들이 다소 삭제됐다. 그렇다고 긴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영화는 현우가 누명을 쓰던 ‘그날’을 속도감 있게 그려내며 초반부터 관객들을 끌어당긴다. 중ㆍ후반부 두 남자가 억눌렸던 감정을 시원하게 표출하는 장면에서는 여느 스릴러 못지 않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유독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들에서 사랑 받은 두 배우 강하늘과 정우는 현실과 극 사이를 능숙하게 넘나든다. ‘동주’에서 맑고 선한 눈으로 시인 윤동주를 연기한 강하늘은 그런 눈빛에 상처와 억울함을 담아 현우를 표현해낸다. 장발과 브릿지, 문신, 흉터 사이에서도 촉촉하게 살아 있는 눈빛은 마치 ‘재심’에서 다루는 ‘숨길 수 없는 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두운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극이 마냥 어둡게만 흘러가지 않는 데는 정우의 공이 크다. 정우는 극 초반 지질함이 묻어나는 변호사 준영을 능청스럽게 표현해내며 자신이 가진 장점을 십분 발휘한다. 이후 ‘돈 있는 자들을 위한 법’이 아닌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법’에 대해 고민하고 현우와 함께 정의를 찾아가고자 결심할 때 정우는 한 번 더 변신한다.

지독하게 억울한 사연을 소재로 했지만 애써 이를 신파적으로 풀어내지 않는다는 점은 영화의 큰 매력이다. 중간중간 관객들을 쉽게 웃기고 울리려는 장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흩트릴 정도는 아니다. 실화 자체가 이미 영화보다 더 영화 같기에 그저 이를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극적이다. 목격자일 뿐이었던 현우가 살인 용의자로 지목 받은 뒤 벌어지는 일들은 억울한 일을 겪어 본 적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만든 법으로 약자를 유린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미안하다’는 한 마디조차 하지 않는 주위의 ‘평범한 악인’들을 ‘재심’은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래서 ‘재심’을 두고 ‘상투적’이라 지적하는 것은 오히려 더 상투적이다. ‘재심’의 진짜 무게는 21세기 현재에도 온갖 상투적인 방법들로 여전히 약자를 옥죄는 세상을 보여주는 데 있다. 영화는 애써 (현실에도 없는) 개연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억울한 자들이 느끼는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설득력 없는지. 119분. 15세 관람가.

사진=오퍼스 픽쳐스 제공

정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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